시도



옛날에 겪은 일 하나가 불쑥 꿈 속에서 재연되었다. 믿음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어쨋든 '어떤 단편적인 기억'으로만 여겼던 일이 꿈에서 되풀이 되고나니, 괜히 어떤 의미를 띄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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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의 동네에는 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곳이 있는데, 나는 그곳을 종종 달리고는 했다. 반환점은 해수욕장이 보일 때까지였고, 그곳에 도착하면 포카리 스웨트로 목을 축인 다음 수타 자장면이나 해장국을 사먹었다. 그러고 나서는 달리 둘러볼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해수욕장이라고 하긴 했지만 되게 심심한 곳이였고, 일몰의 풍경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오밤중이나 새벽녘에 그렇게 달렸으니 그 풍경을 마주할 일은 없었다. 해수욕장까지는 대략 최선을 다해 달려도 편도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에야 그 바닷가를 가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이에 절대 애틋한 마음 탓이 아니라 전적으로 지자체의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내가 고향을 떠난 뒤로 천지개벽을 하게 되었으니..(사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한 구석이 많다)
어찌되었든, 그시절의 나는 그렇게 심심한 목적지였음에도 그곳을 곧잘 향하고는 했다. 혈기왕성이라기보다는 그저 끈적하기만한 삶이여서, 마냥 달리기라도 해야 좀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심하기로는 도착지 뿐만 아니라 그 경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과 바다가 일직선으로 뻗어내린 풍경은 중간지점 쯤에 이르면 더이상 고개를 돌릴만큼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되고는 했는데, 그 반대의 풍경은 더더욱 심심했다. 아파트와 공단의 모습이 반반인 그런 곳이였다. (물론 오른편의 풍경은 상경한 이후로는 매번 내게 감탄을 주고 있다)
그런 풍경을 지나는 동안 아찔함을 느끼게 해주는게 있다면, 다름아니라 들개였다. 아마도 그 심심한 구간의 못된 사람들이 내다버렸을 들개들은 썰물 때 돌무리에 걸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물고기 등을 먹으며 살아가고는 했는데, 이따금씩 새벽마다 사람들을 놀래키고는 했다. 나도 종종 들개를 만나고는 했는데, 초등학생 때 반에서 돌려보던 만화책인 'ㅇㅇ에서 살아남기' 같은 책을 통해 습득한 지혜로 위기를 모면하고는 했다. 바닥에서 돌을 줍고서 던지는 시늉을 하면 개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껴 달아난다는 그 지혜는 한번도 틀린 경우가 없었다. 그 시늉을 하고나면 들개는 일직선 상의 거리에서 한참을 멀어져서, 그날에는 더이상 볼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보통날이 아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내가 어떤 일 때문에 달리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때가 탈까봐 애지중지했던 흰색 라코스테 트랙탑에 스키니진을 입은 채 달렸던 것으로 봐서, 들개를 쫓아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으로 봐서 말이다. 그날 나는 들개를 마주했을 때, 돌을 던지는 대신 'ㅇㅇ에서 살아남기' 류의 책에서 습득한 또하나의 지식인 시선을 낮춘 다음 가만히 서있기를 택했다. '너를 위협하는게 아니라, 그냥 있을 뿐'이라는 의도를 전하고 싶었다. 주인에게 버려진 이후로 사람에게 악에 받쳤을 그 녀석의 두려움을 덜어내주고 싶은 마음이였다, 는 오지랖보다는 그냥 그녀석과 평화롭게 서로를 지나치고 싶었을 뿐이였다. 서로에게 겁먹거나 위화감을 주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나 녀석은 내게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고, 결국 나는 돌을 주어다 던지는 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들개는 하마터면 꼬리를 떨어트릴 뻔 했을 정도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나는 들개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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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게 된 경위가 더욱 중요했을 법한데도 그건 전혀 기억나질 않는 반면, 저 소동만큼은 이따금씩 들개를 보면 떠오르고는 했다. 왜인지 모르겠다만 뭔가 헛헛한 기분을 느낀 채. 그런데 불편히 뒤척인 잠자리 속에서 그 기억을 마주하고 나자, 왜 내가 들개와의 그 기억을 종종 떠올리고 그럴 때마다 마른 웃음을 지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