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저는 방금 제 친구인 Gavin Hills(이하 개빈 힐즈)의 기고문 묶음을 편집했습니다.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며 표지를 보니, 그는 저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짓고 있네요. 그 사진은 1994년 엘살바도르 선거 때 Zed Nelson이 개빈을 찍은 것으로, 아름다운 청년은 펜을 물고 있으며, 그의 앞에 놓인 메모지는 친숙하게도 휘갈겨진 글씨로 덮여 있습니다. 여담이다만 그 메모는 그 당시 제가 에디터로 있던 매거진인 The Face(역주 : 영국의 전반적인 문화를 비롯해 사회문제까지 다루는 잡지)에 그가 쓰고있던 특집 기사의 메모였답니다.
 
  이것은 좋은 표지이지만, 저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 둔탁하고도 아린 통증 만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 책을 작업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저는 오래동안 이 일을 외면했어요. 지난 2주 동안 이 기사를 불필요하게 끄적이고 또 다시 고쳐대는데 시간을 보낸 것 처럼 말이지요. 왜냐하면 이 작업을 끝냈을 때면, 더이상 정리할 말이 없어졌을 때면, 남은 것이라고는 개빈이 죽었다는 사실 밖에 없으니까요.
 
  그의 31번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인 1997년 5월 20일, 그는 몇몇 친구들과 Cornish 해안에서 낚시를 하던 중 바위에서 미끄러졌습니다. 바다는 깊었고 물살은 강했으며, 그리고 개빈은 수영을 할 줄 몰랐지요. 그는 물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Casual 스타일의 소년들 (출처 : 80'S CASUAL CLASSICS. 이하 이미지 클릭 시 링크 이동)

 

  개빈은 Surrey의 Leatherhead 인근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Headley에서 자랐습니다. 10대 초반 무렵 그는 그의 형인 Fraser와 함께 축구 경기를 보러가기 시작했어요. 또한 Casual이라 알려진, 거대하고도 기록된 것이 거의 없는 80년대의 유스컬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옷을 차려입고선, 축구 경기에서 떼지어 다니고, 달리기를 해대거나, 약간은 쌈박질을 하기도 하는 문화 말이지요.
 
  이후 그는 (디자인은 끔찍했다만) 패션을 공부했으며,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긴 다음에는 (스케이트 실력 또한 최악이었지만) 스케이트보드 씬에 속했으며, (아주 훌륭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는 스케이트 매거진인 RaD에서 일하며 스케이트보딩에 대한 두권의 책을 써내기도 했는데, 1991년부터는 The Face에서 짧고도 재미있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빈 힐스가 쓴 기사의 삽입이미지 (출처 : One Up Manship Journal)

 

  그 해 말, 우리는 개빈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축구 훌리건들의 흥망성쇄를 다룬 긴 연재기사를 실었습니다. 잡지가 가판대에 채워진 지 얼마 안되었을 때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하더니, 몇 달 동안이나 계속해서 편지가 오더군요. 독자들은 자신들의 축구 이야기와 Terrace 패션(역주: 축구 관중으로부터 비롯된 패션문화. 그 당시 영국의 경기장은 입석(Terrace)으로 경기를 관람했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음)에 대해 논하는 것에 아주 열띈 이야기를 전해왔는데,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들 모두 개빈을 아주 친밀한 친구처럼 여기며 이야기를 꺼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The Face의 스타 작가 중 한명이 되었으며,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 문화를 주제 삼아 일반적이지 않은 위트와 독창성을 띈 글을 썼습니다. 약물, 클럽, 트레이닝복, 섹스, 스포츠, 컴퓨터 게임 등을 말이지요.
  1992년의 끝무렵에는 포토그래퍼인 Zed Nelson과 함께 소말리아로 간 다음, 다를 바 없는 문체로 그곳의 기근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후에는 분쟁지역에 대한 기사, 특히나 보스니아에 대한 글은 잡지에서 정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사에서 신문의 헤드라인과 TV뉴스에서는 당연스러운 듯 배제되는 그늘진 영역을 다루는데 뛰어났습니다. 기근 지역의 레스토랑이나 전쟁 중에도 성업 중인 나이트 클럽, 병적인 갈등으로부터 나오는 병적인 농담, 그리고 도움이 되는 만큼 해가 되기도 하는 원조 등에 대해 말이지요.

 

국제 앰네스티의 언론상을 수상하는 개빈 힐스 (출처 : The Face)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뉴스의 이면에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조명하는데 뛰어났으며, 정치적인 것을 사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습니다. 가령 Celo 같은 사람들(역주 : 마땅한 Slang을 찾지 못했기에 원문으로 남겨놓음), 핏불을 데리고 있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이, 수상한 나이트클럽, 그리고 한동안 사라예보에서 전쟁영웅이었던 이의 마리화나 취향 등 말입니다. 그리고 소말리아의 굶주린 어머니는 TV 카메라가 자신의 고통을 모든 앵글에 담을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을 두번이나 매장하길 요청했다는 이야기나 앙골라의 젊은 총잡이들이 BBC 라디오에서 나오는 'Rhythm is a Dancer(역주 : SNAP! - Rhythm Is A Dancer)'의 사운드에 맞춰 body-popping 댄스를 춰댄 이야기를 말이지요.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무료한 갱들이 LA 갱의 차량 총격전을 흉내 낸 듯 했지만, 차를 살 여유가 없던 탓인지 버스를 타고서 서로를 죽여대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1993년 여름, 그는 한 소년지인 Phat!을 창간 합니다. 아직 영국의 출판계에서는 마땅치 않다고 여겼던, 젊은 남성을 대상을 목표로요. '훌리건을 위한, 훌리건에 의한'이라는 모토는, 그 불량한 유머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Telegraph에서는 '당신의 십대 아이가 이 잡지를 읽었으면 좋겠습니까?'라며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잡지는 세 차례 발간 이후 끝나버렸지만, 이후 'Loaded'의 성공을 통해 

Gavin은 일종의 증명을 해냈습니다.

 

  그는 the official England(역주 :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을 다룬 잡지)와 Manchester United football magazines에서 에디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Radio 4(역주: BBC의 라디오 방송 중 하나로, 해당 채널은 시사,교양을 주로 다룸)에서도 일했으며, The ObserverThe Guardian을 비롯한 매이져 신문사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잡지에 기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The Idler(역주 : 한가로움(Idling)을 통해 삶의 예술적 탐구를 지향하는 영국의 격월지)에서는 정기적인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에서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무너져버린 이후 찾아온 우울에 대해 진솔하게 써나갔습니다. 또한 그는 대박을 거둔 명작 소설인 Disco Biscuits(역주 : 영국의 레이브 문화를 주제로 다룬 단편 소설집)에 짧은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모든 이야기를 책에 담는 것이 어려웠지만, 끝자락에서 보았을 때 이 책에는 제가 예상 못한 일관성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개빈은 80년 대 말부터 글쓰기를 시작했기에, 그의 글은 새천년을, 그러니까 전에 없던 변화의 시기이자 불확실하면서도 기회를 지닌 시기를 코앞에 두고서 성인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파업과 시위가 더이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된 시대를 자라온 세대였습니다. Live Aid(역주 : 1985년에 개최된 대규모 자선 록페스티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마지막 장면을 차지하는 공연)를 비롯한 여러 자선공연 이후, 모든 오래된 신념과 '이즘(-ism)'이 저물기 시작한 이후 였지요. 한편으로는 마약이 또다른 여가 중 하나였고, 값싼 비행기 티켓과 인터넷이 이전 세대에서는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압축시켜버린 세대였고요.

 

  그의 작품은 축구 문화의 형태가 변화되어 가는 것과 클럽 문화의 성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 무리와 패션의 결합, 소비지상주의의 급격한 치솟음, 그리고 테크놀러지에 대한 우려, 다시 말해 넘쳐나는 정보량과 유례없이 가속화되어가는 변화의 속도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영국인이 되는 것, 남성이 되는 것, 그리고 좌파 혹은 진보적이게 되는 것에 대해 깊은 의문을 띄고 있던 때에, 그것을 고찰하고 재정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이런 이야기를 말할 때에도 좋은 농담을 가득 채웠습니다.

 

  따듯하고, 개방적이고도 즐거운, 그리고 똘끼있는 꿍꿍이들과 훌륭한 아이디어로 가득 했으며,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섬세하고도 여렸던 사람. 개빈은 종종 자신의 시대가 지닌 모순에 인격을 부여한듯 했습니다. 그는 여성을 사랑할 줄 아는 젊은이였으며, 인종차별을 질색하는 애국자였고, 언제나 끊임없이 계획을 지녔던 농땡이꾼이었으며, 그러한 것들이 정치적인 행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치 않았던 향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발전 중인 작가였고, 그가 우리의 곁을 떠나기 전 쯤에는 자신의 첫 소설에 대한 계약서에 잉크를 새겼던 참이었습니다.

 

Miranda Sawyer가 올린 개빈 힐스의 사진 (출처 : Miranda Sawyer의 트위터)

  또한 그는 Miranda Sawyer와 함께 BBCRough Guide 여행 시리즈에 출연하는 것으로 방송계에도 진출 예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레바논을 여행했었고, 그 여름 글래스턴버리 페스티벌에서 입을 로브를 구매했었지요. 그러나 그것을 입기 전에 개빈은 죽어버렸고, Sawyer는 그 없이 시리즈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이렇게 말해요. '나는 매일, 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돼. 그리고 그 사실이 기뻐. 그는 내게 무척이나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그의 부고를 읽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너는 그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구나. 이것은 불공평해"라는 잠기게 돼.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떠나가버렸어. 정말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원문 출처 : The Guardian

 

The twenty-first century boy who never saw the millennium

I've just edited a book, a collection of journalism by my friend Gavin Hills. I'm looking at the cover as I write this, and he is grinning back at me: Gavin photographed by Zed Nelson during the 1994 elections in El Salvador, a good-looking lad chewing on

www.theguard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