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Lad 녀석들에게 무슨일이 생긴거야?

 

 

  '나는 펑크가 좋아. 나는 짭퉁이 좋아. 나는 웨스트햄에서 체포되었다네.

     - 'Police Car', The Cockney Rejects

 

 

  어린 Lad였을 때, 나는 축구를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요즈음에는, 채널을 무작위로 틀어대면서, 나는 가끔씩 떠올려 보고는 한다. 아스날의 유럽대항전 경기와 joy-rider(역주 : 훔친 차를 타고서 정신나간 운전을 하는 놈들) 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이를 와리가리하는 동안, 텔레비전 소리는 내 디지털 hi-fi 시스템이 내는 Danny Rampling(8090년 대 레이브 씬에서 유명했던 DJ )의 믹스셋 소리에 잠겨버린다. 아스날이 득점하고, 차는 180도 회전하고, 화염병은 터진다. 우리의 문명이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두번의 월드컵 동안 그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질 않았다!

  구석에 있는 내 신발장에는, 캥거루 가죽으로 된 Diodora Gold(역주 : 아마도 이 모델인듯) 한 켤레가 진흙이 묻은 보라색 Kickers(역주 : 80년 대에 유행했던 신발 브랜드) 옆에 누워있는데, 맹세컨데 이는 동생의 것이다. 서랍 속에는 Stanley(역주 : 공구회사. 이하 흉기로 의역) 사의 칼과 실로 병신같은 반다나가 들어 있고 말이다. 그 끔찍한 것들은 지난 10년 동안에만 해도 내가 패션 악세서리로 구매하기 적합한 것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대가 변하면, 우리 또한 변할 따름이었다. 어디 시작해보자.

 

  지금 보기에는 난처하겠다만, 10년 전에만 해도 머리를 밀고, 목에 타투를 하고, 대가리를 비운 채 'Oi!(역주 : 감탄사, 대략 '끼얏호우!'같은 느낌)' 거리면서 머리부터 다이빙해대는 것이 15살 짜리 소년이라면 하게되는 무궁무진한 옵션으로 유효했다. 이는 그저 젊은 문화의 무지개에 속하는 방식 중 하나였을 뿐이다. 1981년에는 lad들은, 소울 보이(역주 : 미국의 소울 및 펑크에 영향을 받은 스타일), 스킨헤드, 모드, 펑크, 로커빌리사이코빌리, Crasstafarian(역주 : 아나키스트 펑크 밴드인 CRASS의 신념을 따르는 팬 무리) 등등,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었다. 이 항목에는 끝이 없었다. 네가 정말로 필사적이었다면, 너는 뉴 로맨틱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의학적인 도움을 뛰어넘는게 필요했다면, 그 답안에는 항상 Numanoid(Gary Numan의 팬을 칭하는 단어)가 있었을 것이다.

  네가 이름을 지어봐라, 너도 그럴 수 있다. 그냥 NME의 뒷쪽에 쪼르르 가서는, 그 고급지게 분류된 정체성에 더하라고 하면 되었다. 물론  Sta-Prest(역주 : 리바이스에서 출시했던, 구김없는 치노팬츠. 60년 대 모드족과 스킨헤드 사이에 인기있었다고 한다), 주트 수트(역주 : 참고), bondage trousers나 배기스 쇼츠 같은 것들은 스타일링하기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후로 10년 동안, 영국의 젊은 문화에는 Soccer Casual과 Acid House는 오직 두가지 선택지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 중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근래들어서 병든 것 같다만, 많은 이들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는 근래 들어 일어난 무브먼트들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훌리거니즘에서 엑스터지로의 여정은 실로 기묘하였다.

 

 

(FILA BJ Borg. 출처 : The 1980s Tennis Shop)

  Casual은 1981년에 시작되어 1988년에 끝났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디자이너 의류를 입고서 각 지역을 여행하고 요란스레 즐기고는 했다. 참고 : 1981년에 시작되었다고 칭하는 것에 대해, 나는 'Casual'이라는 명칭이 실제로 불리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북부와 남부 간에 불확실한 토론에 나는 참석할 의향이 없다.

  그 사내들은 싸돌아 다니고, 치장을 채우고, 무진장 악랄하게 느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다음에는 1988년이 왔으므로 그들은 하우스 뮤직을 듣고, 서로 춤추기 시작했다.

  다량의 약물을 취하고, 반다나를 쓴 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Glue(역주 : 약물), Snakebite(역주 : 칵테일)와 다량의 The Rainbow(역주 : 형형 색색의 약물을 한꺼번에 먹는 것을 뜻함)을 시작으로, Armani, Tacchni(역주 : 아르마니와 마찬가지로 이태리 제 브랜드의 이름)와 Elland Road(역주 : 리즈 유나이티드의 홈구장)를 거쳤고, 그 다음에는 소량의 Special K(역주 : 약물의 종류 중 하나)와 그런 류의 알약들을 부탁해, 친구. 그 모든 기억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희미해져가는군. 너도 이제 목격했지만... 뭐, 모두들 그저 빙 둘러 앉은 채 돌이 되어가는 군.

  흉기를 휘두르는 훌리건이 사랑에 차오른 레이버로 전환하는 것은 쉽게 그려지는 풍경이었다. 허나 사람들이 훌리건이 된 것이나 그만두게 된 것의 이유를 설명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약물로 인한 변화라고 할 수는 없었다. 1980년 대의 Casual 무브먼트는 많은 것들의 정점이었다. 병신같은 옷을 입은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전혀 새로울 것 없었고, 축구장에서의 폭력도 마찬가지었다. 1950년 대의 짤막한 분열기에도, 게임이 시작된 이래로 또다른 갈래의 폭력 시기는 존재해왔다. 그것은 실제로, 세기의 전환기와 1970년 대 말에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모든 Casual한 것은 축구 팬들의 풋사과스러운 요소를 통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모양새는 이전에 Soul Boy, Mod, Skin 혹은 Punk타입의 갈래에 속했던 그 어느 어린 lads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다. 즉 Fila BJ(역주 : Fila의 스폰서쉽을 받은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Björn Borg의 이름을 딴 제품군) 상의를 입고서 볼링을 치거나 자신의 영역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해야할 것'이 된 것이다. 모든 축구 클럽은 홀리건 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 Casual 유니폼은 누구나 가입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출처 : abebooks.co.uk
출처 : 트위터

 

  그 문화는 자연스레 찾아왔다. 1980년대의 대부분의 lads는 Richard Allen의 Skinhead, Suedehead and Boot Boys를 샀다. 그들은 생물학 수업시간에 몰래 'Tottenham Boys We Are Here'을 펼쳐보았다. 그들은 축구장에서의 폭력 행위가 지닌 유산을 놀이터에서의 여갓거리로 받아들였다.

 

  Panorama사의 악명높은 1978년(역주 : 실제로는 1977년) Millwall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인물인 Harry the Dog는 (Spurs 팬들이 노래하곤 했던 것처럼) 실제로는 푸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쌈박질은 어린 영혼에는 영웅시 되었다. Spurs와 Arsenal의 라이벌 관계가 벌인 싸움은, 그리스인 혹은 로마인들 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이었다.

출처 : uisameron

  최초의 Casual 갱들은 이렇게 길러졌다. 그들은 '좋은 망나니, 좋은 쌈박꾼' 류 에는 속하지 않는 Boot boy(70년 대의 훌리건을 칭하는 단어)였다. 그들은 관할구 내의 동네 불량배들을 우러러 보았다. 본디 런던의 모습이라하면 소매치기나 장물애비가 속한 것이었다.  Farah(역주 : 1970년 대에 영국에서 국민 브랜드로 여겨지던 작업복 위주의 브랜드)의 슬랙스, Crocodile의 신발과 Burberry 자켓. 유럽대항전은 더 많은 대륙의 스포츠웨어 스타일을 유입시켰다.

  지역마다 다른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The News of the World는 형편없는 클럽 바이 클럽 안내서를 제공하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Leeds에는 deerstalker(역주 : 귀덮개가 달린 모자)가 소개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부에 속한 우리들 중 몇몇은 그 무렵 아주 불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질투는 이제 불신으로 바래졌다.(역주 : 토트넘, 아스날 등의 북런던 축구팀에 비해서 첼시, QPR 등 남부에 가까운 축구팀들은 당시 유럽대항전에 나갈 성적이 되지 못했다.)

  북런던과 서런던의 캐쥬얼 패거리들은 지네들만의 빛나는 스타일을 개발해갔다. 이 젊은 패션왕들의 대부분은 Lyceum Ballroom(역주 : 런던 중심부에 있는 공연장)에서 마주치고는 했는데, 그곳에서 Ladbroke Grove(QPR / 첼시)의 소년들과 북런던(주로 아스날)의 lad들이 맞붙어 쌈질을 벌이고는 했다.

 

  이 젊은 불량배들이 축구장에서 다시금 만났을 때, 늙은 술고래들은 시선을 집중하고는 했다. 풀럼 브로드웨이(역주 : 지하철역 이름. 첼시FC의 연고지와도 가까이 있다)에 출몰한 아스날 패거리의 모습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Fila의 트랙수트를 입고 있었고, 이는 초록색 군복을 입고있던 늙은 첼시 팬들에게 웃음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무리들에게는 내키지는 않지만 존경심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들 또한 쇼핑을 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사건들이 방방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북런던에는 최고의 도둑들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어느 도전자들이 가장 쩔어보였는 지를 말하는 것은 내게 먼 일이었다.

  여기 오래된 전통과 그에 걸맞는 옷을 지닌 새로운 깡패 무리가 있었다. 모든이들이 축구 캐쥬얼 무리가 되었고, 많은 바보짓이 일어났다. 캐쥬얼이 어찌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꽤 복잡하다. 이는 곧 폭력을 뜻했기 때문이다.

  어찌 지속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쉽다. 이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루한 일거리나 학교에 갖혀있던 대다수에게, 캐쥬얼은 곧 훌륭한 일탈이었다. 그들은 큰 패러기에 속해 빈둥거리고, 좋은 옷가지를 입고, 방방곳곳을 여행하고,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에 속하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캐릭터를, 최고의 소년들을, 이야기들을 즐겼다. 그들은 매달 다른 브랜드 이름을, 토요일 마다 새로운 단어를, 그리고 분 단위로 또다른 포즈를 취하는 것을 즐겼다. 할 얘깃거리도 존재하고, 모험도 존재하였다. 또 다른 시간 대에서, 그들은 해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폭력행위를 즐긴 것은 극 소수의 사람들에 부로가했다. 그들은 캐쥬얼 문화의 분위기, 그것이 지닌 힘, 폭력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흥분을 즐겼다. 실제로 폭력적인 유형의 대부분은 절대로 [캐쥬얼 복식에 어울리는] 복장을 입지 않는 부류에서 발생한 것이다. 근육이 없는 녀석들은 수많은 전선 속을, 그리고 올바른 장소에 속한 친구들과 살아갈 줄 알았으며, 제 분수를 알기 마련이다.

  캐쥬얼이란 네가 너의 새 아르마니 점퍼, (빨간 라벨과 작은 사이드 포켓이 있는) Ball의 청바지, 그리고 너의 첫 팀버랜드를 신고 토요일에 나타나는 것이다. - 보고, 느껴라. 이는 첼시의 어느 녀석이 말한 것처럼 '킹스 크로스에서 리즈로 간 다음, 희열에 찬 바람에 3일 동안 잠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열광에 취하기 위해서였다.

(역주 : 첼시 FC와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라이벌 관계는 꽤나 거대한 편인데, 특히나 7080년 대에는 양 팀의 훌리건 간에 마찰이 컸다고 한다 / 출처 )

 

헤이젤 참사의 광경 (출처 : British GQ)

  1988년이 되자, 그 웅성거림은 사라졌다. 축구는 유감스러운 상태에 쳐했으며, 훌리거니즘 또한 마찬가지 였다. 그것이 무너진 것에는 가지가지 이유가 있었다. 헤이젤 참사는 그 중 하나였다. 헤이젤은 재앙이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죄책감에 병들게 만들었다. 헤이젤은 다른 입석 전투 만치 난폭하지 않았음에도, 41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많은 이들을 패닉에 빠트렸다.

  그 참사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구겨버리고 벽을 무너뜨렸으며, 정부와 경찰들은 과민반응했다. 이는 상황을 악화 시키기 시작했다.  더이상 소년들을 위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헤이젤 참사가 훌리거니즘을 죽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정치적 변화가 예고 되었다.

  정부의 반응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거의 도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 축구팬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다. 유일하게나마 긍정적인 결과물이 있다면, 축구와 훌리건에 대한 정부의 무지에 대한 반발으로, 서포터의 연합이 구성된 것과 팬 잡지의 확산이다. 이것들은 게임의 재건을 위한 주춧돌을 마련해주었다.

 1988년 대 까지 인구의 변화는 1970년 대 후반에 비해 10대 소년의 수가 백만명이나 감소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유스컬쳐의 소모는 1981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로 쭉 감소하였다. 1980년 대 초반의 많은 젊은이들은 16살에 학교를 떠났다. 대부분이 전혀 관심 따위를 갖지 않았다. 그들이 결국 무엇을 했는 지에 대해서.

  10년이라는 주기가 끝을 맞이할 때, 너는 16살이라는 것에 서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역주 : 영연방에서는 16살 부터 법적 책임을 진다) 그 선택은 학교에 남거나, 일자리를 찾거나,  수많은 직업훈련소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너는 돈을 원했고, 일자리를 원했기에, 네가 학교에서 했던 모든 것들은 사실상 직무 상의 기호를 찾기위한 일환이었다. 직업은 투쟁해야할 무언가가 되었다.

  축구 클럽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끌어들인 지역 사회도 바뀌었다. 네가 너의 동네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알고 너희 지역에 있는 모든 녀석들과 학교에 다녔을 적에만 해도, 너는 지연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축구 패거리는 외부로부터 인구 유입이 이루어졌을 때, 대개 하드코어한 애향심이 되고는 하였다.

  더 악명 높은 훌리건 패거리 중 일부는 더 거대한 축구 클럽이 아니라, 긴밀한 지역 사회에서 비롯되었다. 30명 남짓한 웨스트 햄의 팬들이 전국의 절반을 일주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council house(역주 : 공공 주택. 임대 아파트처럼 생각하면 될듯)의 민영화와 부동산 시장의 투기화는 많은 도시의 사회 구조를 바꾸었다. 런던의 소년들은 각자 북런던에서는 Essex, 남런던에서는 Kent, 서런던에서는 Slough와 같은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네가 무리를 형성하고 싶다고 한들 광고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훌리건이란 지역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전해야 하는 것이니까. 1988년에는 이렇게 장소와 사람들, 마음가짐 같은 것이 모두 변화하게 되었다.

(역주 : 영국은 1988년 주택법 개정으로 인해 임차인 보호가 약화되면서, 런던 지역의 임대료가 과도하게 상승하였다. 참고 )

 

출처 : Mixmag asia

 

  이후 Acid 하우스라는 웃는 얼굴의 친구가 나타났고, 소년들은 새로운 화제거리를 발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축구 Casual 폭력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에 질려버렸기에 멈춰버렸다. 누군가는 너무 늙었고, 누군가는 그저 지루했을 뿐이고, 그리고 다른 누군가들은 그것이 축구에 끼치는 피해를 깨닫게 되었다.

 

 

  Acid house는 캐쥬얼이라는 선박이 난파될 무렵, 아주 좋은 구조선 역할을 해주었다.

  이전에는, 오직 두가지 종류의 나이트 클럽 만이 존재했다. 하나는 니가 깔끔한 옷을 입고 가서는, 로컬 라디오 놈들이 틀어대는 게 뭐든 상관없이 믿을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나이트 클럽, 혹은 니같은 놈은 결코 출입할 수 없는 트렌디한 클럽.

  레어한 그루브와 웨어하우스 파티가 동 트게 된 상황은 더 많은 어반 소울 보이 / 재즈 펑크 놈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좋은 음악, 좋은 분위기, 그리고 폭력이 없는 클럽에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몇몇 북런던 소년들은 The Wag같은 클럽에서 DJ 일을 얻기 시작했다.

  88년의 '나이스한 감정의 여름(역주 : = The Second Summer of Love)'에 클럽 씬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자, 남아있던 훌리건 녀석들이 뛰어들어 왔다. 그들의 불량스러운 이미지가 애씨드 아후스의 좀더 긍정적인 정체성으로 바뀌게 된 것이 기뻤으며, 욕지거리였던 많은 적수들이 스펙트럼(역주 : 사우스런던에 있던 애시드 클럽)과 클링크 스트리트(역주 : 애시드 클럽이 밀집 되어 있던 거리)에서 함께 맛가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레이빙은 비내리는 날의 뉴캐슬 원정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캐쥬얼은 안락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The Wag Club의 바에서 웃고 있는 소녀 / 출처 : The Guardian

  그렇게 모든 Lad들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냐고? 아니다, 이것은 폭력에 대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추잡한 녀석들은 아무리 명랑해보인다. 한들 추잡함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는 단지 패션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할 일'은 새벽 두시에 핀스버리 파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클럽을 나온 다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증오와 폭력에 순응하는 만큼 행복과 평화에도 순응했다.

  애초에 폭력을 즐기던 녀석들은 바뀐게 없었다. 누군가는 좀 누그러지고, 클럽의 기도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조직력이 좋은 몇몇 녀석들은 그들 만의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말이 가드닝 서비스 같은 것을 뜻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마약 거래나 클럽 입구에서 협박질을 하는 것을 뜻한다.

 

ICF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The Firm(1988). 개리 올드먼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ICF (Inter-City Firm / 역주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훌리건과 관련된 훌리건 패거리) 는 정치가 배제된 일종의 이스트 앤드의 IRA(역주 : 아일랜드 공화국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그들 만의 레이브를 즐기기 시작하였고, 다른 이들은 클럽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부는 그 패거리들이 기업가정신을 띈 사회로 싹트게 된 것에 만족감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토요일의 축구 경기를 즐기러가는 미치광이들이 몇 명 있기는 했다. 그들은 절대 그 습관을 버릴 수 없어 보였다. 지난 몇 년 간의 그들을 말하자면, 그들은 마약과 코카인, 그리고 엑스터시에 완전히 중독되었다는 것이었다.

  Millwall의 원정 경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대부분은 몇몇 늙은 고집불통에 의해 발생했다. 엑스터시는 너를 싸움으로부터 예방하지 못할 것이며, 되려 네가 그 상황을 더 즐기게 만들었다. 몇 명은 과다복용으로 인해 죽기도 했다. 동부 패거리의 알려진 누군가는, 감정을 주체못하게 된 바람에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쑤셔박기도 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은 여전히 범죄적으로 불안정한 몇몇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지난 월드컵에서 이따금씩 그 증거를 보였다. 유럽 대륙에서 축구 훌리건이 부상한 것은, 많은 외국인 패거리가 판만 짜여진다면 날 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무감각해진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과 춤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수 년 동안 의학계는 이를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레이빙은 무언가를 성취해내었다. 축구 폭력의 유산은 중단되었다. 어린 사내 이야기꾼들은 테라스 싸움을 미친듯이 밤을 새워가며 하는 이야기로 대체하였다.  그들은 Cockney Rejects가 아닌, Flowered Up을 듣는다. 

  나쁜 아이들은 나쁜아이가 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힘, 흥분,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은 그것을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들이 동경할 새로운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옷을 입지만, 이따금씩 DJ를 하고, 중요한 클럽에서 쥐어짜지고, 또한 그들은 '허브'와 '화학물질'을 주머니에 채워넣고 있다. 매번 가끔씩, 그들은 머리 뒤에 축 늘어진 포니테일을 씻기고는 한다.

  이는 여전히 바보같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훌리건 때처럼 서로를 그렇게 엿같이 내몰고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꽃의 아이들(역주 : 히피를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그저 좀더 실마리를 지닌 아이들일 뿐이다.

 

Rod Stewart가 모델이었던 Kickers

  그 순간을 그렇게 칭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가깝다. 폭력의 부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남성스러움이 패션에서 배제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브라이튼의 해변가에서 모드족과 락커들이 첫번째 싸움을 벌인 뒤로 15년 이후, 다음세대가 그 모든 것을 다시 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패션은 돌고 도는 끔찍한 습성이 있다. Kickers를 봐라.

  그러나 1981년의 Lad들에게, 지난 10년은 삶에 깊이 새겨질만한 교육이었다. 너가 전면적인 축구 폭동의 한가운데에 서있었을 때, 너를 둘러싼 모든것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네가 친구들로 가득찬 들판에서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 재끼고서, 춤을 추고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때, 그 때 너는 애정과 증오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그저 전적으로 혼란이다.

  트랙슈트, 트레이너, 그리고 이너시티 트레인(역주 : 훌리건들이 원정경기를 떠날 때 주로 이용한 기차). 이제는 턴테이블과 trip(역주 : 환각제를 복욕하는 것을 뜻하는 slang), 그리고 테크노. 

누가 좀 skin up 좀 시켜줘, 제발 skin up 좀 시켜줘 (역주 : Skin up은 진정시키다라는 뜻 외에 대마를 말다는 슬랭이 있음)

 

'지난 밤에는 어땠어?'

'쩔었지, 40개 쯤 팔았어'

'나는 파티에 대해 얘기한거야'

- 'It's On', by Flowered Up 


THE FACE, December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