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구만 구천 편의 시 속에 네가 없는 것은 참혹하다. 이 밤 형광등과 달과 은하와 내 생의 빛까지 가닿지 못하는 종이 위엔 네 그림자뿐. 수십 장의 파지 속엔 일순 삶을 끊어낸 수백 그루 나무, 발목 잃은 수천의 새들, 쫓기는 생의 눅진함을 쉬던 산짐승의 그늘이 수만 평 젖어 있다. 그들이 올려보던 별자리가 네 얼굴이다. 내 아비와 그 아비의 우주에도 다만 너뿐이어서 그리움이 낙엽 타는 냄새처럼 코끝을 울리는 계절에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낡은 비유는 내 전생(前生)의 전생(全生)에 걸쳐 네게 불태운 백단향의 기원. 내 일대기는 거리에 지문 한번 찍고 돌아서는 눈과 비. 네게 각인되기 위해 구름으로 빚은 인장(印章)들의 역사다. 아득한 인간의 하루에 아로새겨지는 그 봄가을이 네 향내다. 핏빛 인주로 밀입국한 너의 세계는 꺼내면 빛에 흐리고 두면 새로 찍을 수 없는 필름같이 숨에 걸리고. 그 흑연색의 감광(感光)이 또한 네 몸짓이다. 이 너절한 몇 겁 생의 조각보로 널 오롯이 덮고 싶었으나 지상의 시간은 허청허청 석양 속으로. 심해어 같은 숱한 잠상(潛像)들이 활개치는 여기. 다시 네 이름만이 내 전생(轉生)의 마르지 않는 고해이다. 그대여,
 새로 쓰는 모든 서정시의 서문은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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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성년의 날 기념으로 이현호 시인의 새로 쓰는 서정시를 꺼내어 읽었다.

까닭은, 별조각들에 자꾸 번역한 노랫말만 올리고 있어서, 시를 읽지 않은 지 오래된 것만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성년의 날 기념으로 아침에 시 한편을 꺼내고 싶어졌고, 이왕이면 나를 위해 불러주고 싶은 시를 꺼내었다.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