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제가 사랑하였거나 사랑하기를 그만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다를 바 없는 제 갈망이었습니다.
Quanto amei ou deixei de amar é a mesma saudade em mim.
: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 중 하나인 알바루 드 캄푸스의 시 'Sim, sou eu, eu mesmo, tal qual resultei de tudo,'에 나오는 문장.

위 문장은 Agora의 바이닐 속지에 인용되어 있는 문장이자 유일하게 쓰인 문장입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남아공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이후로는 모국인 포르투갈에서 생애를 보낸 문학가로, 앞서 언급한 이명 외에도 몇십개의 이명을 지닌 작가입니다. 본명을 가리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닌 또다른 화자로서 존재하는 이름으로, 그는 개개의 이명에게 별도의 국적, 연령,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을 부여했습니다. 다중인격인 것도, 그렇다고 의도적인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이 발견한 또다른 존재로 말입니다.

Fennesz(이하 페네스)는 왜 이 작가의 문장을 빌려 음반의 서사를 대신 전했을까요? 저는 재작년에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매일 밤 한두 챕터 씩 읽어나갈 때 마다 페네스의 음악을 함께 들었는데, 여담다만 저는 하루의 페이지를 마치고 나면 눈을 감고서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복기한답니다. 페소아의 책을 읽고나서도 그렇게 되짚어 보았는데, 점차 책에 쓰인 단상들이 배경음악처럼 듣던 페네스의 음악을 받쳐주는 이미지로 떠오르고, 그 이미지는 페네스의 모습이 되었다가, 이내 저 자신의 모습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보다 더 깊이 이 음반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페네스가 이 작가의 시구를 빌린 것은 단순히 그 문장이 전해주는 감상이 와닿았을 뿐만 아니라, 페소아의 세계를 떠올리며 음악을 써낸 것 같았고요. 그런 감상을 느끼고 나니, 제 나름대로 감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는 이쯤에서 잠시 줄이고, Fennsez의 7번째 정규음반에 대해 소개를 본격적으로 하겠습니다. 이 음반은 무언가에 대해 꺼낼 이야기가 없다면, 더이상 정규 음반을 제작하지 않을 것' 이라고 선언한 바 있는 음악가가 5년만에 발표한 음반으로, 그가 SPIN지와 가진 인터뷰를 참조해서 인용 및 작성했습니다.
(https://www.spin.com/2019/04/fennesz-agora-interview-left-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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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ora, Agoraphobia
'당신도 그렇듯, 자신이 세상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싶은 지를 확신 못하지 않는가? 무엇이 자신을 그곳에 자리하게 만드는지, 왜 그렇게 여기는 지를 설명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저 일어날 뿐이다.
(중략)
아고라… 아고라 공포증. 아고라는 그리스의 옛 시장이다. 오늘날은 아고라가 무엇인가? 그것은 소셜미디어다. 그곳은 모두가 만나는 장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포증도 있다. 고립되어 있다. 당신도 그렇듯, 자신이 세상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싶은 지를 확신 못하지 않는가? 무엇이 자신을 그곳에 자리하게 만드는지, 왜 그렇게 여기는 지를 설명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저 일어날 뿐이다. 이런 것들이 초기의 생각들이었다. 더 이상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광장공포증. 그리고 첫 번째 트랙인 "내 방에서"는 물론 이것을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 아시다시피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내 존재했던 광장을 칭합니다. 그곳을 떠올릴 때면 아마 정치나 종교 및 사상에 대한 의논이 이루어진 장소만을 연상하기 쉽겠지만, 그외에도 연극이나 운동, 혹은 친목도모나 상업적 등 사회적 연결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페네스는 그 사회적 연결점이 아닌, 그로부터 파생된 의미인 'Agoraphobia(광장공포증)'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묘사하고 싶어지면서 부터 Agora의 서사를 써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In My Room
한편, 이 앨범의 제작에는 환경적 요인 또한 그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10년 정도 이용한 스튜디오의 임대료가 수직상승하는 바람에 재계약을 포기하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간단한 장비들만 두고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에게 큰 제약이 되었습니다. 아파트라는 주거 특성상 층간소음 문제로 인해 앰프나 스피커를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세심하고도 거친 울림을 퍼트리는 음악가가 헤드폰이라는 제한적인 음향기기에 의존해 곡을 만들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출처가 떠오르지 않는 인터뷰에서는, 장비를 집에 두기 위해서 딸의 방을 치울 수 밖에 없었다고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당연히 페네스는 다소간 답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헤드폰에 귀를 기울이며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첫 음반을 만들던 때에도 현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과정이 친숙하게 여겨지면서 믹싱과 마스터링까지도 헤드폰으로 마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호흡을 나누며 서사를 이어나간 덕분에 페네스는 자신이 겪은 환경의 문제를 '다소간의 불편'이라 간단히 얘기 하였지만, 그렇게 ‘다소간'이라 여기기까지 느낀 감정은 어떠하였을까요?
저는 자신의 음악이 이룬 성취와는 달리 임대료도 못내는 현실과 홈스튜디오에서의 불편, 그리고 sns라는 새로운 광장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등, 그가 말하지 않거나 함축시켜버린 근심을 음악을 들으며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여담이다만 그는 비치보이즈의 팬이기도 한데, 집에서 광장공포증을 생각하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브라이언 윌슨을 떠올리고는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 할 때, 브라이언 윌슨은 창작에 대한 강박 뿐만 아니라 광장공포증 또한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인가 싶었다고 하네요. 그런 점에서 비치보이스의 곡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곡 In My Room은 일종의 헌정으로 느끼며 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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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의 배경을 소개하는 것은 이쯤으로 하고 감상을 전하겠습니다.
각 10분 가량의 러닝타임을 지닌 네개의 곡을 짙은 질감 속에서 기승전결을 유기적으로 흘러보냅니다. 'In My room'이라는 이름의, 개인적이자 폐쇄적인 공간으로 시작하는 곡은 퍼즈를 입힌 기타의 드론이 퍼져나갑니다. 마치 해무가 끼는 듯한 사운드스케이프 속에서 실체적 공간은 점차 내면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렇게 둘러쌓인 안개의 공간 속에서 서서히 비가 내리다 퍼붓고, 다시한번 쏟아내리는 듯 한 'Rainfall'은 음반에서 가장 격정적입니다. 짙은 디스토션으로 부유하는 멜로디와 거친 스트로크는 두번의 프레이즈에서 서로 내면과 외면의 뒤엉킴처럼 주부를 바꿔가며 곡을 이끄는데, 두번째의 프레이즈에서부터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신스의 드론음이 확장됨과 함께 사라집니다. 마지막에 울리는 차임벨은 마치 비가 그침으로써 의식을 마쳤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세번째 트랙이자 표제작인 'Agora'는 본 음반에서 가장 고요하며, 내면으로의 침잠을 이끄는 곡입니다. 비가 그친 후에도 여전히 구름이 낀 듯한 기분을 주는 신스의 드론은, 자칫 듣기에는 광장이라기에는 뼈대 따위의 그 어떠한 흔적 조차도 남아있지 않는 빈터의 황량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고요함 속에서 서서히 공명하듯 어우러지는 기타와 신스의 멤도는 소리에 귀기울인 채 좀더 의식의 눈을 감으면, 나와의 대화를 기다리는 또하나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적인 앰비언트 같지만 드론의 톤과 소리의 상호관계는 내밀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은 나와 내 자신의 은밀한 대화들로 인해 심연에 울리는 파장같습니다.
음반의 마지막 곡에 이르면 드디어 안개가 걷히고, 나는 '우리'가 되어 태양을 겨눕니다. 다양한 프레이즈 속에서 팽창하고 해소되는 듯한 이곡은, 내면의 자신을 통해 불안으로부터 과거로의 여정을 거쳐 지금을 다시 맞이하고, 미래를 향한 선언을 하는 듯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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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나에게 준 것은 단 두 가지뿐이다. 몇 권의 회계장부와 꿈꾸는 능력’
앞서 언급한 페르난두 페소아가 살았던 시기의 포르투갈은, 경기침체로 인해 구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뽀르뚜까'라는 멸칭을 들으면서도 일자리를 빌어 구할 정도였으며, 정세 또한 왕정의 몰락 및 두 차례의 공화정이 두 차례나 수립 되는 등의 불안한 환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페소아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살다 사후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는데요, 이는 그가 죽은 뒤 친구들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글더미 덕분입니다. 그가 이명 중 하나인 리스본의 보조회계원 ‘소아레스’의 이름으로 써나간 작품인 불안의 서를 통해서요. 이 작품은 단상의 묶음집으로,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불안의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그저 불안하고 음울하지는 않습니다. 낙관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체념한듯 써나간 듯 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바라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듯한 글들을 통해 달리 위로받고 부추김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페소아가 이 ‘글더미’를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써나가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누군가가 지닌 삶의 단편을 빌려 ‘소아레스’라는 인물을 만들었지만, 또다른 인격으로서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며 그가 죽을 때까지 써내려간 생각이니까요.

개인적 환경과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내는 불안은 20세기 초반의 포르투갈이나 빈의 어느 스튜디오의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올랐을 무렵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하지요. 뭐 요순시대에도 누군가에게는 존재했지 않을까 싶고요. 그렇기에, 쨍하고 해뜰 날이 오길 기다리는 것 보다는, 오롯이 자신을 바라보기 위한 시도를 하는 것이 불안 속에서 오롯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렇게 두 이야기를 어찌 엮어가며 얕은 감상을 써나가는 것 또한, 일종의 그런 시도이기도 하지요.
불안의 서에 쓰여있는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우리들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이용해 스스로를 다르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한다. 진실한 풍경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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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견디면서 자신과 하나로 남아 있는 자는 행복하다. 불안으로 인해 변화를 겪었으나 자신과 분리되지는 않은 자는 행복하다. 불신하면서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햇빛 아래 앉아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