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 사랑 따위가 내 알 바 아니지

:라이너스의 담요, 어느새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소주를 살 일도, 노래를 부를 일도, 춤을 출 일도 없을 텐데.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어젯밤 외투없이 마당에서 담배를 피는데(또 금연실패)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가을조차도 어느새 지나가려는 듯한 쌀쌀함이 느껴져, 계절을 좀더 머금으려는 마음으로 라이너스의 담요의 음반 'Magic Moments'를 취침송으로 골랐다. 그러나 다섯번째 트랙인 '어느새'의 전주가 흐를 때까지도 잠들지 못한 채 노랫말에 귀기울이게 되자, 잠을 포기하고 그 곡을 반복시킨 뒤 침대에 기대앉은 채 술을 마시며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안주삼아 읽었다.

어느새의 가사에서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랑 탓으로 돌리고 있기에, 그 노래를 듣다보면 똑같은 이유로 '사랑따위'를 말한 김연수 작가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떠올리게 되더라.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쉽게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가 그려지는듯한 인물 세명의 이야기 사이에,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담긴 소설이다.

약간의 궁상스러움이 찰지게 빚어진 비유와,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명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비롯한 그시절의 언어가 촌스럽게 튀어나오는 세 남녀와 주변인물 간의 대화는 희극처럼 읽힌다. 반면 그들의 '한심한 담론'이 오가는 사이에 해설처럼 끼어드는, 사랑에 대한 작가의 말은 한마디로 고급지다. 사랑을 정의한 다른 문학의 말을 빌려오거나 어원을 풀어내기도 하며, 인물들의 궁상으로부터 사랑의 결을 포착해 정의 내리는 말을 읽다보면 이 책은 사랑의 현상학 같기도 하다.

한편 기똥찬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진탕을 벌이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읽다 보면, 우리가 둘러앉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제3자의 시선에는 이와 다를 바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저마다의 운명론과 취향, 혹은 경향에 어찌 당위성을 부여하지만, 주정뱅이 상태에서 자신의 관점만 고집하는 바람에 어찌 결론이 나지않는 말을 되풀이하는 우리이기에. 그런 점에서 그들의 궁상스럽고 찌질한 이야기를, 단순히 사랑론을 펼치기 위한 대상이 아닌 돌이켜보는 우리의 이야기로써 읽게 된다.

 

선영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영에게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광수. 어쩌면 그순간이 그의 사랑에게는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광수를 통해 질투가 사랑의 교체선수가 되는 아이러니함을 말하는 반면, 진우는 사랑을 할때 드러나는 찌질함을 말한다. 낭만적 사랑도 KS마크가 필요한 공산품일 뿐이라던 진우는 뒤늦게 잘못된 기억의 영수증을 흔들고 선영을 붙잡아보려 하지만, 그 결과는 피로연에서 축가랍시고 ‘얄미운 사람'을 부르게 될 뿐이다. 광수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난 뒤에도 선영에게 질척이던 진우는 허망한 마음으로 봄길을 걷고, 이내 경복궁에서 왕비 없이 홀로 곤룡포를 입고 사진을 찍는다.

광수와 선영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급양복을 무리해서 사입던 진우가 제 사이즈도 아닐 뿐더러 많은 사람들이 돌려입었을 쌈마이한 기념사진용 곤룡포를 입고 홀로 고궁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은, 허세의 이면에 가려졌던 찌질함을 돋보이게 해준다. 그래도 비웃고 싶은 청승스러움이 아닌, 사진값 만오천원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은 마음이려나.

 

 

읽다보니 몇년 생부터 이 책 속의 흘러간 지난 유행어를 포착하지 못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사랑해 선영아'는 내 또래들도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고, '너도 결혼은 미친 것 같냐'고 묻던 선영의 말은 그저 거친 표현으로만 받아들여 질 것 같다. 그나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봄날은 간다'를 다섯사람 중 두사람 정도는 봤을테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에는 피식거릴려나.

다만 그것들을 언급하는 자체가 마치 소설속 학생운동에 얽힌 논쟁처럼 철지난 사람이 되었음을 내보이는 꼴인가 싶기도 하다. 하하.

시절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다기억을 마냥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기에는, 바래진 모습조차도 완벽한듯 버무려 현혹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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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중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난 후일담 소설만 보면 형상기억 브래지어가 생각나. 세탁기에 돌리면 일반 브래지어가 좀 상하듯이 사회에 나가면 적당히 망가져야만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거든. 졸라리 많아. 망가지는 게 정상인데, 자꾸 옛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니까 이거 문제가 많은 거지. 자기 젖은 AA컵이 됐는데, 브래지어는 아직도 D컵뿐이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허전하겠냐? 그러니까 자꾸만 돈에 미치거나 과대망상에 빠지거나 잃어버린 세월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거지. 그 문제 해결하는 건 간단하거든. 새로 AA컵 사면 돼."

 

 

2019.10.31 작성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I thought the sun rose in your eyes
And the moon and the stars were the gifts you gave
To the dark and the endless skies
나 그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대 눈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달님과 별님은 이 어둡고 끝없는 하늘에
그대가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했지요

The first time ever I kissed your mouth
I felt the earth move in my hand
Like the trembling heart of a captive bird
That was there at my command, my love
나 그대의 입술에 처음 입 맞추었을 때
내 손에서 대지가 일렁이는 기분을 느꼈어요
마치 사로잡힌 새의 떨리는 심장처럼 말이지요
그것은 제가 바라던 것이었지요, 내 사랑

And the first time ever I lay with you
I felt your heart so close to mine
And I knew our joy would fill the earth
And last 'til the end of time, my love
나 그대의 곁에 처음 누웠을 때
그대 심장이 보다 내 곁에 있음을 느꼈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의 기쁨이 이 세상을 채울 것이란 걸 알게되었어요
삶의 끝자락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것도요, 내 사랑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Your face
Your face
Your face
나 그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대의 모습을, 그대 모습을, 그대의 모습을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지느러미 달고
바다 속을 떠돌아다니며
물고기들 손끝으로 만지다 놓아주던
여름이 있었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떠올리지 않은 채
한쪽 끝과 한쪽 끝에
가난한 집 한 채가 놓인 길 위를
맨발로 걷기만 하던
여름이 있었고

소낙비를 맞아
뚝뚝 물이 떨어지는 곳을 입고
맑은 하늘이 다 말려줄 때까지
강 건너는 물소를 쳐다보며 앉아 있던
여름이 있었고

젖은 나뭇잎들 끌어 모아
한 잔 찻물을 끓이기 위해
한나절을 불 지피던
여름이 있었다

10월도 여름이었고
11월도 여름이었고
12월도 여름이었으나

눈 뜨면 봄이었고
그날 아래 가을이었고
꿈속은 겨울이었던
여름이었다

우수(憂愁) 어린 정원
피어 있는 꽃에 싸느다란 비가 내린다.

그러자 여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없이 자신의 임종을 맞이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나뭇잎이 펄럭펄럭
높다란 아카시아나무로부터 떨어진다.

그러자 여름은 깜짝 놀라 힘없는 미소를
꿈이 사라지는 마당에다 보낸다.

이미 그 전부터 장미꽃 옆에서
다소곳이 휴식을 기다리고 있던 여름은

이윽고 천천히 그 커다란
피곤에 지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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