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전자담배를 구입했다. 작년 생일선물로 J가 사준 것을 잃어버린 탓에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액상을 피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제 또다시 J에게서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말과 함께 향을 받자 크리스마스 때 들은 쿠사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J는 그나마 몸에 덜 해로우라고 사준 액상담배를 사줬건만, 여전히 연초를 꺽꺽 피워대는 내가 얼마나 미웠겠냐. 미안하고 고마워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고서는, 다시 구매한 것을 인증했다.

 

 어릴적에만 해도 나는 담배를 피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몸 상하는 것은 둘째치고, 돈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틀 혹은 사흘마다 스무번의 행위를 위해 2000원 내지 2500원을 태우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정말 돈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우린 가난한 동네의 아이들이 아니였던가. 물론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이유를 생각하며 손사레 치질 않았지만, 내가 그러기에는 한달에 음반 한 두 장은 살 수 있는 기회비용이 머리에 먼저 떠올라서 도무지 담배를 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이따금씩 친구들이 단둘이 있을 때, 평소와는 다른 텐션으로 이야기를 꺼낼 때 마음 기울이듯 빌려 피는 일 외에는 학창시절에 흡연의 기억은 달리 없었다. 다만 그 덕분에 골목에 숨어서 나눈 대화와 멍 때리기는 이따금씩 홀로 골목에서 담배를 필 때면 떠오르고는 한다.

 내가 담배곽을 들고 다니게 된 것은 카페나 바에서 일하면서 부터 인데, 쉬는 시간이 달리 없었다보니 형누나들과 가게의 뒷편에서 이런저런 실없는 얘기를 나눌 때나 피고는 했다. 그 습관 조차도 군대에 들어간 이후로는 아까워서 접었다. 계원도 적은데 담배를 필 때면 뒷담화가 이리저리 오가는 것도 싫었고, 흡연이 농땡이의 명분이 될 때는 부끄러움까지 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간헐적'이라는 말을 붙여 흡연자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비흡연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던 내가 흡연자가 된 것은 27살 때부터인데, 흡연자인 여자친구를 사귀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만 해도 혼자서 담배를 피던 애인은, 점차 혼자 있기 싫다는 이유에서 혼자 피기 싫다는 말을 하며 담배를 함께 피자고 했고, 반 동거를 하고난 뒤로는 어느새 내가 먼저 아침마다 담배를 피우자고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년 가까이 지내며 흡연을 하고나니, 정을 떼는 일은 쉬웠어도 담배를 떼는 일은 여전히 요원해져버리더라.

 

 금연을 하려는 노력은 꽤 많이 했지만, 변명을 하자면, 사람들과 함께 있는 도중 나만의 브레이크 타임을 가질 수 있는 점이 좋아서 쉬이 노력대로 되질 않더라.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있어도, 누군가와 시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피로가 되는 내게 담배는 혼자 있을 시간의 명분이 되어주었고, 비흡연자가 많은 친구들 곁을 떠나 노래를 들으며 골목에 기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싶을 때에도, 한숨과 작은 불빛은 내게 위로가 되어주고는 했다.

 

 J에게 전자담배를 받았을 때는 그런 이유에서 난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구의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좋아서, 눈 앞의 불빛 대신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며 피우고는 했다. 어느덧 강산이 변하는 시간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라고는 1년도 채 되지 않지만,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지만 어느정도는 알 수 있는 사이에서 전한 염려가 좋았다.

 그러다가 올해 중순 부터 그 우정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부러짐 속에서 다시 지나간 불빛에 의존해버리고, 그러는 동안 친구의 선물을 잃어버리고... 그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전자담배로 바꾼 것에 안도하던 누나가, 다시 연초를 피우는 모습에 야단 대신 흉물스러운 곽을 가릴 수 있는 케이스를 사 준 점도 그렇고.

 

그런 부끄러움과 미안함, 고마움 때문에, 무엇보다도 나를 덜 해치기 위해서라도 이제 연초를 피우지 않는 것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점점 빈도를 줄이고, 그 다음 해에는 금연을 목표로 해야지. 3년 이라는 기한을 두고, 금연의 첫발짝을 다시 떼보련다.

 

When you stop being a ghost in a shell

너가 속이 텅빈 유령처럼 굴길 멈추고

And everybody keeps saying you look well

모두가 계속해서 네게 좋아보인다고 말을 건낼 때

Don't miss it

놓치지마

Like I did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어제, 생각치도 못한 새해인사를 카카오톡으로 받았다. 열기 전까지만해도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여서 괜히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는데, 메시지 창을 열고서 보니 이전에 보내준 핸드크림 덕분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J로부터의 연락이었다.

 작년에 J가 선물해주었던 핸드크림은 백단향을 품은 The Shell이었는데, 그 이름을 보자마자 James Blake의 Don't Miss It의 노랫말이 떠올랐었다. 'When you stop being a ghost in a shell'이라는, 껍데기 속의 유령처럼 굴길 멈추라는 구절이.

 그 당시에도 그 노래를 들으며 지금을 놓치지 않고 있음에 기뻐했는데, J의 안부인사와 함께 지난 기억을 짚게 되니 많은 위로와 부추김을 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야지, 현재를 놓치지 말고, 친구들과의 기쁨, 유대를 놓치지 말아야지.

 

하루 늦은 답신을 보내기 전에, James Blake가 Don't Miss It을 부르기 전에 전한 말을 다시 꺼내어 본다.

 

제 생각에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이 노래를 다시말하자면... 우리는 살아가며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다고 저는 생각해요.

I'm really.... the only way, I think to really live in the present is to say exactly what's on your mind. and to say exactly how you feel. and so I, this what this song is basically about... I so think we miss a lot a life.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 김승일, 나의 자랑 이랑

 

-


 지난달 말쯤, 내게 고민을 털어놓는 (J)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도 나약해진 모습을 보았다. 몇해 간 점점 작아져가고 있긴 했다만, 혼자 꾹꾹누르질 못한 이야기를 결국 꺼내었을 때는 속상해서 울화가 터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답지 않은 오지랖을 부렸는데, 다음날 아침에 본 (J)의 메시지에서는 또다시 아픔을 감당할 것이라고 쓰여있었다. 어찌되었든 결실을 맺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밤새 울먹이다 내렸을 결론에 내가 달리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자랑 이랑'을 띄워 보내었다. 그래도 확실하게 전하고픈 말은 있어서.
 그런데 이 시를 띄우고 나니 J가 떠올랐다. 내가 (J)에게 띄워주었듯이, J 또한 내게 이 시를 띄워주었다보니 말이다. 올해 초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알 수 없게된 그 친구로부터 '나의 자랑 이랑'을 받은 것은, 4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몇 해 동안의 잠수를 끝낸 다음 J를 찾아갔는데, 연락처도 없어서 무식하게 아파트 입구에서 마냥 기다렸다. 제발 이사만은 가지 않았기를 비나이다 하면서. 다행히도 그 오밀조밀한 동네에 별이 쏟아진 것마냥 곳곳에 불이 켜지고, 평상에 더불어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이 주무시러 들어가셨을 무렵에 J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아마 부산이 아니라 강원도였다면 나는 아마도 샤이닝의 마지막 장면처럼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몇해만에 불쑥 찾아온 주제에 나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친구의 오른쪽 네번째 손에 끼워진 반지에 갖게된 반가운 호기심을 포함해 이런저런 근황을 미주알 고주알 캐물어 대었다. 그런 무례함 앞에서도 J는 되물어보는 것 없이 마음껏 반겨주고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카페를 나왔고, 가파지른 언덕을 한참 말없이 오르던 중 J는 내게 김승일 시인님의 '나의 자랑 이랑'이라는 시를 아냐고 물어보았다. '희지의 세계'와 '구관조 씻기기'는 읽어봤지만 '에듀케이션'은 읽어보질 않은터라 그 시는 초면이었는데, 질문을 들은 당시에는 '하필'이었지만 지금은 그 빈틈이 있어 다행이었다.

 모른다는 내 말에 J는 '잠시만' 이라 말한 뒤, 휴대폰을 뒤적이고서는 시를 불러주었다.
 그때는 내 친구가 여전히 시를 채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기뻤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J 또한 나약해진 친구를 마주하고서 달리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시를 띄워다주는 것이어서, 그래서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시를 불러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초라한 마음을 바라볼 수 있었던 J는, 아마 어떤 말로 나를 위로하면 좋을지 머릿속 서재를 아주 뒤적거렸을 것이다. 자존심만 센 바람에, 남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약점을 내비친 것으로 여기며 부끄러워하는 친구를 위해서. 그렇다보니 그 숨차는 언덕길에서도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고, 내 가냘픈 뒷모습을 보고서야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를 떠올린게 아니었을까 싶다.
 여러모로 J는 내게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김승일님과 이랑님이 분류한 인간의 여섯 종류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외에 또 어떤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운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 친구를 그 속에 넣어놓을테니. 물론 '나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포함해서.

 언젠가 어느 때에 재회한다면, 그때는 내가 J에게 '나의 자랑 이랑'을 불러줄 것이다. 너를 위해 불러줄 수 있는 노래가 없으니, 그 시라도 너처럼 마음 다해 불러줘야지.

20211013

 

 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를 나는 네게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까?
너한테 불러줄 수도 없는데.
네가 그린 그림들은 하얀 벽에 달라붙어서
백지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고.
단아한 가방들은 내다 팔기 위해 만든 것들, 우리 방을 공장으로, 너의 손목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들.
그 가방들은 모두 팔렸을까? 나는 몰라,
네 뒤에 서서 얼쩡거리면
나는 너의 서러운,
서러운 뒤통수가 된 것 같았고.
그러니까 나는 몰라,
네가 깔깔대며 크게 웃을 때
나 역시 몸 전체를 세게 흔들 뿐
너랑 내가 웃고 있는
까닭은 몰라.
먹을 수 있는 걸 다 먹고 싶은 너.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오리발 같아 도무지 신용이 안 가는 너는, 나무 위에 올라 큰 소리로 울었지.
네가 만약 신이라면
참지 않고 다 엎어버리겠다고
입술을 쑥 내밀고
노래 부르는
랑아,

너와 나는 여섯 종류로
인간들을 분류했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아
막 박수치면서,
네가 나를 선한 사람에 
끼워주기를 바랐지만.
막상 네가 나더러 선한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다른 게 되고 싶었어. 이를테면
너를 자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나로 인해서,
너는 누군가의 자랑이 되고
어느 날 네가 또 슬피 울 때, 네가 기억하기를
네가 나의 자랑이란 걸
기억력이 좋은 네가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얼쩡거렸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이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1 ··· 12 13 14 15 16 17 18 ···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