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홍차와 아스파라거스가 필요하지만

부추나 가지에도

기억은 땅속줄기처럼 주렁주렁 따라나오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삼척으로 가지

 

당신 없는 여름은 갈취일 뿐이고

어떤 변명도 유치할 뿐이라고

자외선이 환청처럼 파고들고

파도가 발을 걸지만

당신을 내다버릴 생각에 골몰했지

 

맹목과 장롱, 서랍이 비워지고

서류의 칸이 비워져

마침내 우울도 비워지기를

 

커튼을 떼어 무진장의 햇빛을 들여놓고

빛 속에서 비로소

인생이 내 손아귀에 들어 있음을 알았지

 

어머니라는 규칙을 몰아낸 후

텅 빈

뼈의 휴식

 

빛이 스러지면

재의 방

 

당신이 죽어야 살 수 있고 당신이 죽어도 죽을 수 있구나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회전문처럼

여전히 나를 돌리고 있는 당신

금지옥엽

죽지도 않는 당신

영성체를 얻었다면
달랐을까요.

그동안 저는 인간적으로 성숙하는 대신 들쥐처럼 이빨이 자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습니다. 이빨을 갈고 이빨가루를 모아 퉷, 더럽게스리, 침에 개어 반죽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효험을 기대하며
곤죽이 된 사랑이라 해도 사랑이라면 아무 상관없다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하. 하. 하. 또박또박 한국어로 웃었습니다.



정말 그랬던 걸까요.

실은 저는 이빨만 빼고
무럭무럭 줄어드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小心琉璃, 발음되지 않는 중국어로
유리를 조심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흰 가운을 뒤집어쓴 채 실험실에 틀어박혀
야금야금 시간이나 갉아먹는 건지도요.



보고 싶었어요. 애타게요.

하지만 이토록 오랜만일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원을 달렸다
숨이 몸보다 커질 때까지

숨만 쉬어도 지구 반대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여기 너무 아름답다
우리 꼭 다시 오자

겨울 별자리가 가고 여름 별자리가 올 때까지
녹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내 다정한 안부를 전해요
둘이 듣는 혼잣말처럼, 한 번도 들린 적 없는 속삭임처럼

여기는 지구의 첫 별이 뜨는 곳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모서리를 접는 곳
이상하게 부풀었다가 기쁘게 사라지는 곳

그러니 잊어도 좋아요 구름을 구획하는 바람이 우리를 거둘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여행을 떠나요
기억할 필요 없어요
뚫린 천장 위로 날아간 새가 자신의 곡선을 기억하지 않듯이
처음 태어난 지도를 따라
단종(斷種)될 말들의 사막을 건너가요

모래의 책을 건널 때마다, 넓어서 캄캄할 때마다
깊은 구름이 달려왔다
나는 절망을 절정으로 바꿔 적기 시작했다

내가 건넌 것은 구름의 푸른 웅덩이
내가 지나야 할 곳은 푸른 웅덩이 속 검은 구름

나는 어제보다 느려졌고 나는 내일보다
조금 길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슬프거나 아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언제나 처음인 저녁 쪽으로
마지막의 들판 쪽으로

그러니 이제,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아요
묻은 것과 묻지 못한 기억 밖으로
여행을 떠나요
돌고 돌아 돌아오지 않을 쪽을 향해
당신의 짧은 눈썹에서 햇빛이 사라지기 전에

곧 흩어질 내 인사를 전해요

짙푸른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의 굽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런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

사소한 사라짐으로 영원의 단추는 채워지고 마는 것
이 또한 이해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건
누군가의 마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는 일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잠시 가슴을 두드려본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행성에 노크를 하듯
검은 하늘 촘촘히 후회가 반짝일 때 그때가
아름다웠노라고,

하늘로 손을 뻗어 빗나간 별자리를 되짚어볼 때
서로의 멍든 표정을 어루만지며 우리는
곤히 낡아갈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알고도 밤은 갔다

그렇게 가고도
아침은 왜 끝끝내 소식이 없었는지
이제는 이해한다
그만 다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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