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따지고 보면 나도 누군가와 마주보며 서태지나 너바나나 블러나 패닉의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이렇구나, 나는 이런데, 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끔찍한 일들에 문을 닫아건 채 골방에서 혼자 썩어 죽어가는 날들이 지겨워 미치기 직전일 뿐이었다. 근데 자리에 있던 76년생 글쟁이가 뽕짝 분위기로 끌고 가버렸다. 야이 같은 76년생인데 왜 뽕짝이냐. 제발 좀 멋있게 놀자고 다음에 보면 말해봐야겠다.
다만 그렇게, 전에는 모르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윤이형, 천 번을 반성하면 어른이 될 줄 알았지: 2009~2010 중에서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과 어울려 공연을 보고, 뒷풀이라고 할 법한 시간을 보내었다. 발단은 신분증을 두고 간 채 공연을 보러간 탓이었는데, 앞서 스태프 석에 앉아 있던 지인을 피해 고개를 숙였음에도, 달리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던 까닭에 결국 그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인사를 나누고, 빌붙은 다음에는 연락처를 다시 전하게 되었는데, 30분 쯤 지나자 여유가 생긴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잠시 담배 피울 겸 밖으로 나오면서 그의 다른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다시 들어갈 때는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빚을 갚을 겸 사게 된 술은 다시 또 얻어먹는 술이 되었고, 요즘에 레이브 문화를 회상하는 글을 옮기며 시간을 보낸 탓인지, 더욱 지난 시절을 떠올리었던 터라 예전에는 하지 않던 법썩까지 떨어대었다. 그 탓인지 메인 타임이 끝나고 숙소로 가려던 계획은, 모든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반은 정신을 놓은 채로, 또다른 사람들이 합세하는 걸 즐기며 시간을 보내었다.

  모든 이벤트가 끝난 다음에는 그 중의 다른 사람의 제안에 따라 그 사람의 집에서 마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기 전까지는 마냥 들뜬 기분이었다. 토를 하고 난 다음에는 괜히 부끄러운 기분과 함께 차분함이 찾아온 터라,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늘어진 몇 사람을 정돈하는 정돈하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드러 눕는 대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는 걸 택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담배를 태우다, 괜히 오늘의 일을 강 따라 복숭아 밭에 도착한 사람처럼, 이상하고도 즐거워 하는 걸 시작으로 또다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시금 술을 곁들인 탓인 탓인지, 피어오르는 취기 따라서 다들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모르는 이름도 섞이긴 했지만, 명월관이나 케이크숍이나 앤써나, 지산이나 글로벌개더링이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연찮게도, 나이는 물어보질 않았지만,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이야깃거리들이 나왔다.

  그 얘기를 들으니, 아마 이 자리에서 말고도 언젠가 한번은 또 같은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다는 그래서 일까, 감길 듯한 피로감이 찾아왔을 때는 이 취기를 빌린 반가움이 다시 눈을 뜨게 될 무렵에는 퇴색될 것을 생각하니 괜히 더욱 쓸쓸한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잠시 바람 쐬러 간다는 핑계로 나온 뒤로는 숙소를 향해 갔다. 아마 문 여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들고 내게 어딜 가냐고 물어본 사람 조차도, 아침이 되었을 무렵에는 나라는 사람이 어젯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숙소까지 걸어오는 길은 한시간이나 걸렸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였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우연찮게 사람들과 어우러진 시간이 참 많았다. 재작년 연말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곧 주점 내의 사람들과 어깨 동무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의 이뤄지지 않을 약속에 동조를 한 채 상징을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을 다시 방문한 사람이 있을까, 라기에는 우리 세명부터 그러질 않았지 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그렇게 우연한 만남에서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끝마친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스무살 초반에는 그런 하룻밤의 약속에 괜히 의무감을 느끼기도 했다가 이내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헛헛해진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다시 그런 우연과 약속이 입 밖으로 나와 귀에 닿을 때면 애를 쓰게 되었지만 말이다.

  한때는 그런 것에 괜히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가, 점점 바라는 마음과 이후 상처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충돌한 것이라 이해하려 하고, 또 어느 무렵부터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는 주문에 불과하다 여기게 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런 일들에 대해 헛헛해하며,어찌되었든 비겁한 내가 재회를 피하길 택하게 되었다. 사실은 괜히 내가 두려워 외면하는 것일 뿐이라 생각할 때, 가끔씩 어쩌면 이어졌을지도 모를 유대를 떠올려 볼 수 있는 것이니까.

  레이브 문화는 대량의 음악 카테고리로 쪼개어진다. 약물 문화는 풍토병이 되어, 젊은 무리를 전반적으로 얽매었다.

 베를린에서의 여정에서, 그 젊은 이는 한때 동 베를린의 정부청사였던 버려진 건물에 뿌리내린 채 대세를 띄고 있는 테크노 클럽을 경험한다. Graham Taylor의 잉글랜드 대표팀이 EURO 92에서 굴욕을 겪은 뒤로, 그는 자신이 축구보다 약물을 더 즐기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약물은 거의 그 어느 것보다도 그러했다.

  여름이 끝에 다다를 무렵, 그는 기근이 한창인 무렵의 소말리아로 떠날 기회가 생긴다. 그 이후의 6주는 그의 삶을 바꿔놓는다. 그가 죽음과 전쟁, 그리고 기근을 눈 앞에서 목격하게 되면서, 그의 젊음이 지닌 천진난만함이 침식되어 갔다. 정치적 확신은 혼란이 되어갔다.

 

개빈이 쓰지못한 반 자전적인 소설, STRINGS OF LIFE(삶의 끈)를 간추린 글에서

Lad 녀석들에게 무슨일이 생긴거야?

 

 

  '나는 펑크가 좋아. 나는 짭퉁이 좋아. 나는 웨스트햄에서 체포되었다네.

     - 'Police Car', The Cockney Rejects

 

 

  어린 Lad였을 때, 나는 축구를 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요즈음에는, 채널을 무작위로 틀어대면서, 나는 가끔씩 떠올려 보고는 한다. 아스날의 유럽대항전 경기와 joy-rider(역주 : 훔친 차를 타고서 정신나간 운전을 하는 놈들) 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이를 와리가리하는 동안, 텔레비전 소리는 내 디지털 hi-fi 시스템이 내는 Danny Rampling(8090년 대 레이브 씬에서 유명했던 DJ )의 믹스셋 소리에 잠겨버린다. 아스날이 득점하고, 차는 180도 회전하고, 화염병은 터진다. 우리의 문명이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두번의 월드컵 동안 그들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질 않았다!

  구석에 있는 내 신발장에는, 캥거루 가죽으로 된 Diodora Gold(역주 : 아마도 이 모델인듯) 한 켤레가 진흙이 묻은 보라색 Kickers(역주 : 80년 대에 유행했던 신발 브랜드) 옆에 누워있는데, 맹세컨데 이는 동생의 것이다. 서랍 속에는 Stanley(역주 : 공구회사. 이하 흉기로 의역) 사의 칼과 실로 병신같은 반다나가 들어 있고 말이다. 그 끔찍한 것들은 지난 10년 동안에만 해도 내가 패션 악세서리로 구매하기 적합한 것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대가 변하면, 우리 또한 변할 따름이었다. 어디 시작해보자.

 

  지금 보기에는 난처하겠다만, 10년 전에만 해도 머리를 밀고, 목에 타투를 하고, 대가리를 비운 채 'Oi!(역주 : 감탄사, 대략 '끼얏호우!'같은 느낌)' 거리면서 머리부터 다이빙해대는 것이 15살 짜리 소년이라면 하게되는 무궁무진한 옵션으로 유효했다. 이는 그저 젊은 문화의 무지개에 속하는 방식 중 하나였을 뿐이다. 1981년에는 lad들은, 소울 보이(역주 : 미국의 소울 및 펑크에 영향을 받은 스타일), 스킨헤드, 모드, 펑크, 로커빌리사이코빌리, Crasstafarian(역주 : 아나키스트 펑크 밴드인 CRASS의 신념을 따르는 팬 무리) 등등,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었다. 이 항목에는 끝이 없었다. 네가 정말로 필사적이었다면, 너는 뉴 로맨틱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의학적인 도움을 뛰어넘는게 필요했다면, 그 답안에는 항상 Numanoid(Gary Numan의 팬을 칭하는 단어)가 있었을 것이다.

  네가 이름을 지어봐라, 너도 그럴 수 있다. 그냥 NME의 뒷쪽에 쪼르르 가서는, 그 고급지게 분류된 정체성에 더하라고 하면 되었다. 물론  Sta-Prest(역주 : 리바이스에서 출시했던, 구김없는 치노팬츠. 60년 대 모드족과 스킨헤드 사이에 인기있었다고 한다), 주트 수트(역주 : 참고), bondage trousers나 배기스 쇼츠 같은 것들은 스타일링하기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후로 10년 동안, 영국의 젊은 문화에는 Soccer Casual과 Acid House는 오직 두가지 선택지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 중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근래들어서 병든 것 같다만, 많은 이들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는 근래 들어 일어난 무브먼트들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훌리거니즘에서 엑스터지로의 여정은 실로 기묘하였다.

 

 

(FILA BJ Borg. 출처 : The 1980s Tennis Shop)

  Casual은 1981년에 시작되어 1988년에 끝났다.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이 디자이너 의류를 입고서 각 지역을 여행하고 요란스레 즐기고는 했다. 참고 : 1981년에 시작되었다고 칭하는 것에 대해, 나는 'Casual'이라는 명칭이 실제로 불리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북부와 남부 간에 불확실한 토론에 나는 참석할 의향이 없다.

  그 사내들은 싸돌아 다니고, 치장을 채우고, 무진장 악랄하게 느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 다음에는 1988년이 왔으므로 그들은 하우스 뮤직을 듣고, 서로 춤추기 시작했다.

  다량의 약물을 취하고, 반다나를 쓴 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Glue(역주 : 약물), Snakebite(역주 : 칵테일)와 다량의 The Rainbow(역주 : 형형 색색의 약물을 한꺼번에 먹는 것을 뜻함)을 시작으로, Armani, Tacchni(역주 : 아르마니와 마찬가지로 이태리 제 브랜드의 이름)와 Elland Road(역주 : 리즈 유나이티드의 홈구장)를 거쳤고, 그 다음에는 소량의 Special K(역주 : 약물의 종류 중 하나)와 그런 류의 알약들을 부탁해, 친구. 그 모든 기억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희미해져가는군. 너도 이제 목격했지만... 뭐, 모두들 그저 빙 둘러 앉은 채 돌이 되어가는 군.

  흉기를 휘두르는 훌리건이 사랑에 차오른 레이버로 전환하는 것은 쉽게 그려지는 풍경이었다. 허나 사람들이 훌리건이 된 것이나 그만두게 된 것의 이유를 설명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약물로 인한 변화라고 할 수는 없었다. 1980년 대의 Casual 무브먼트는 많은 것들의 정점이었다. 병신같은 옷을 입은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전혀 새로울 것 없었고, 축구장에서의 폭력도 마찬가지었다. 1950년 대의 짤막한 분열기에도, 게임이 시작된 이래로 또다른 갈래의 폭력 시기는 존재해왔다. 그것은 실제로, 세기의 전환기와 1970년 대 말에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모든 Casual한 것은 축구 팬들의 풋사과스러운 요소를 통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모양새는 이전에 Soul Boy, Mod, Skin 혹은 Punk타입의 갈래에 속했던 그 어느 어린 lads의 표준이 되었던 것이다. 즉 Fila BJ(역주 : Fila의 스폰서쉽을 받은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Björn Borg의 이름을 딴 제품군) 상의를 입고서 볼링을 치거나 자신의 영역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해야할 것'이 된 것이다. 모든 축구 클럽은 홀리건 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 Casual 유니폼은 누구나 가입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출처 : abebooks.co.uk
출처 : 트위터

 

  그 문화는 자연스레 찾아왔다. 1980년대의 대부분의 lads는 Richard Allen의 Skinhead, Suedehead and Boot Boys를 샀다. 그들은 생물학 수업시간에 몰래 'Tottenham Boys We Are Here'을 펼쳐보았다. 그들은 축구장에서의 폭력 행위가 지닌 유산을 놀이터에서의 여갓거리로 받아들였다.

 

  Panorama사의 악명높은 1978년(역주 : 실제로는 1977년) Millwall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인물인 Harry the Dog는 (Spurs 팬들이 노래하곤 했던 것처럼) 실제로는 푸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의 쌈박질은 어린 영혼에는 영웅시 되었다. Spurs와 Arsenal의 라이벌 관계가 벌인 싸움은, 그리스인 혹은 로마인들 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이었다.

출처 : uisameron

  최초의 Casual 갱들은 이렇게 길러졌다. 그들은 '좋은 망나니, 좋은 쌈박꾼' 류 에는 속하지 않는 Boot boy(70년 대의 훌리건을 칭하는 단어)였다. 그들은 관할구 내의 동네 불량배들을 우러러 보았다. 본디 런던의 모습이라하면 소매치기나 장물애비가 속한 것이었다.  Farah(역주 : 1970년 대에 영국에서 국민 브랜드로 여겨지던 작업복 위주의 브랜드)의 슬랙스, Crocodile의 신발과 Burberry 자켓. 유럽대항전은 더 많은 대륙의 스포츠웨어 스타일을 유입시켰다.

  지역마다 다른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The News of the World는 형편없는 클럽 바이 클럽 안내서를 제공하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Leeds에는 deerstalker(역주 : 귀덮개가 달린 모자)가 소개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부에 속한 우리들 중 몇몇은 그 무렵 아주 불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질투는 이제 불신으로 바래졌다.(역주 : 토트넘, 아스날 등의 북런던 축구팀에 비해서 첼시, QPR 등 남부에 가까운 축구팀들은 당시 유럽대항전에 나갈 성적이 되지 못했다.)

  북런던과 서런던의 캐쥬얼 패거리들은 지네들만의 빛나는 스타일을 개발해갔다. 이 젊은 패션왕들의 대부분은 Lyceum Ballroom(역주 : 런던 중심부에 있는 공연장)에서 마주치고는 했는데, 그곳에서 Ladbroke Grove(QPR / 첼시)의 소년들과 북런던(주로 아스날)의 lad들이 맞붙어 쌈질을 벌이고는 했다.

 

  이 젊은 불량배들이 축구장에서 다시금 만났을 때, 늙은 술고래들은 시선을 집중하고는 했다. 풀럼 브로드웨이(역주 : 지하철역 이름. 첼시FC의 연고지와도 가까이 있다)에 출몰한 아스날 패거리의 모습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Fila의 트랙수트를 입고 있었고, 이는 초록색 군복을 입고있던 늙은 첼시 팬들에게 웃음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무리들에게는 내키지는 않지만 존경심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들 또한 쇼핑을 하게 만들었다. 비슷한 사건들이 방방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북런던에는 최고의 도둑들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어느 도전자들이 가장 쩔어보였는 지를 말하는 것은 내게 먼 일이었다.

  여기 오래된 전통과 그에 걸맞는 옷을 지닌 새로운 깡패 무리가 있었다. 모든이들이 축구 캐쥬얼 무리가 되었고, 많은 바보짓이 일어났다. 캐쥬얼이 어찌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꽤 복잡하다. 이는 곧 폭력을 뜻했기 때문이다.

  어찌 지속 되었는가를 말하는 것은 쉽다. 이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루한 일거리나 학교에 갖혀있던 대다수에게, 캐쥬얼은 곧 훌륭한 일탈이었다. 그들은 큰 패러기에 속해 빈둥거리고, 좋은 옷가지를 입고, 방방곳곳을 여행하고,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에 속하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캐릭터를, 최고의 소년들을, 이야기들을 즐겼다. 그들은 매달 다른 브랜드 이름을, 토요일 마다 새로운 단어를, 그리고 분 단위로 또다른 포즈를 취하는 것을 즐겼다. 할 얘깃거리도 존재하고, 모험도 존재하였다. 또 다른 시간 대에서, 그들은 해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폭력행위를 즐긴 것은 극 소수의 사람들에 부로가했다. 그들은 캐쥬얼 문화의 분위기, 그것이 지닌 힘, 폭력이 만들어내는 불안한 흥분을 즐겼다. 실제로 폭력적인 유형의 대부분은 절대로 [캐쥬얼 복식에 어울리는] 복장을 입지 않는 부류에서 발생한 것이다. 근육이 없는 녀석들은 수많은 전선 속을, 그리고 올바른 장소에 속한 친구들과 살아갈 줄 알았으며, 제 분수를 알기 마련이다.

  캐쥬얼이란 네가 너의 새 아르마니 점퍼, (빨간 라벨과 작은 사이드 포켓이 있는) Ball의 청바지, 그리고 너의 첫 팀버랜드를 신고 토요일에 나타나는 것이다. - 보고, 느껴라. 이는 첼시의 어느 녀석이 말한 것처럼 '킹스 크로스에서 리즈로 간 다음, 희열에 찬 바람에 3일 동안 잠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열광에 취하기 위해서였다.

(역주 : 첼시 FC와 리즈 유나이티드 FC의 라이벌 관계는 꽤나 거대한 편인데, 특히나 7080년 대에는 양 팀의 훌리건 간에 마찰이 컸다고 한다 / 출처 )

 

헤이젤 참사의 광경 (출처 : British GQ)

  1988년이 되자, 그 웅성거림은 사라졌다. 축구는 유감스러운 상태에 쳐했으며, 훌리거니즘 또한 마찬가지 였다. 그것이 무너진 것에는 가지가지 이유가 있었다. 헤이젤 참사는 그 중 하나였다. 헤이젤은 재앙이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죄책감에 병들게 만들었다. 헤이젤은 다른 입석 전투 만치 난폭하지 않았음에도, 41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많은 이들을 패닉에 빠트렸다.

  그 참사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구겨버리고 벽을 무너뜨렸으며, 정부와 경찰들은 과민반응했다. 이는 상황을 악화 시키기 시작했다.  더이상 소년들을 위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헤이젤 참사가 훌리거니즘을 죽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정치적 변화가 예고 되었다.

  정부의 반응 대부분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거의 도움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반 축구팬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데 많은 효과가 있었다. 유일하게나마 긍정적인 결과물이 있다면, 축구와 훌리건에 대한 정부의 무지에 대한 반발으로, 서포터의 연합이 구성된 것과 팬 잡지의 확산이다. 이것들은 게임의 재건을 위한 주춧돌을 마련해주었다.

 1988년 대 까지 인구의 변화는 1970년 대 후반에 비해 10대 소년의 수가 백만명이나 감소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유스컬쳐의 소모는 1981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로 쭉 감소하였다. 1980년 대 초반의 많은 젊은이들은 16살에 학교를 떠났다. 대부분이 전혀 관심 따위를 갖지 않았다. 그들이 결국 무엇을 했는 지에 대해서.

  10년이라는 주기가 끝을 맞이할 때, 너는 16살이라는 것에 서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역주 : 영연방에서는 16살 부터 법적 책임을 진다) 그 선택은 학교에 남거나, 일자리를 찾거나,  수많은 직업훈련소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너는 돈을 원했고, 일자리를 원했기에, 네가 학교에서 했던 모든 것들은 사실상 직무 상의 기호를 찾기위한 일환이었다. 직업은 투쟁해야할 무언가가 되었다.

  축구 클럽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끌어들인 지역 사회도 바뀌었다. 네가 너의 동네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알고 너희 지역에 있는 모든 녀석들과 학교에 다녔을 적에만 해도, 너는 지연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축구 패거리는 외부로부터 인구 유입이 이루어졌을 때, 대개 하드코어한 애향심이 되고는 하였다.

  더 악명 높은 훌리건 패거리 중 일부는 더 거대한 축구 클럽이 아니라, 긴밀한 지역 사회에서 비롯되었다. 30명 남짓한 웨스트 햄의 팬들이 전국의 절반을 일주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council house(역주 : 공공 주택. 임대 아파트처럼 생각하면 될듯)의 민영화와 부동산 시장의 투기화는 많은 도시의 사회 구조를 바꾸었다. 런던의 소년들은 각자 북런던에서는 Essex, 남런던에서는 Kent, 서런던에서는 Slough와 같은 지역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네가 무리를 형성하고 싶다고 한들 광고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훌리건이란 지역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전해야 하는 것이니까. 1988년에는 이렇게 장소와 사람들, 마음가짐 같은 것이 모두 변화하게 되었다.

(역주 : 영국은 1988년 주택법 개정으로 인해 임차인 보호가 약화되면서, 런던 지역의 임대료가 과도하게 상승하였다. 참고 )

 

출처 : Mixmag asia

 

  이후 Acid 하우스라는 웃는 얼굴의 친구가 나타났고, 소년들은 새로운 화제거리를 발견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축구 Casual 폭력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에 질려버렸기에 멈춰버렸다. 누군가는 너무 늙었고, 누군가는 그저 지루했을 뿐이고, 그리고 다른 누군가들은 그것이 축구에 끼치는 피해를 깨닫게 되었다.

 

 

  Acid house는 캐쥬얼이라는 선박이 난파될 무렵, 아주 좋은 구조선 역할을 해주었다.

  이전에는, 오직 두가지 종류의 나이트 클럽 만이 존재했다. 하나는 니가 깔끔한 옷을 입고 가서는, 로컬 라디오 놈들이 틀어대는 게 뭐든 상관없이 믿을 수 없이 취하게 되는 나이트 클럽, 혹은 니같은 놈은 결코 출입할 수 없는 트렌디한 클럽.

  레어한 그루브와 웨어하우스 파티가 동 트게 된 상황은 더 많은 어반 소울 보이 / 재즈 펑크 놈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좋은 음악, 좋은 분위기, 그리고 폭력이 없는 클럽에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몇몇 북런던 소년들은 The Wag같은 클럽에서 DJ 일을 얻기 시작했다.

  88년의 '나이스한 감정의 여름(역주 : = The Second Summer of Love)'에 클럽 씬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자, 남아있던 훌리건 녀석들이 뛰어들어 왔다. 그들의 불량스러운 이미지가 애씨드 아후스의 좀더 긍정적인 정체성으로 바뀌게 된 것이 기뻤으며, 욕지거리였던 많은 적수들이 스펙트럼(역주 : 사우스런던에 있던 애시드 클럽)과 클링크 스트리트(역주 : 애시드 클럽이 밀집 되어 있던 거리)에서 함께 맛가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레이빙은 비내리는 날의 뉴캐슬 원정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캐쥬얼은 안락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The Wag Club의 바에서 웃고 있는 소녀 / 출처 : The Guardian

  그렇게 모든 Lad들이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었냐고? 아니다, 이것은 폭력에 대한 치료법이 아니었다. 추잡한 녀석들은 아무리 명랑해보인다. 한들 추잡함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는 단지 패션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할 일'은 새벽 두시에 핀스버리 파크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클럽을 나온 다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증오와 폭력에 순응하는 만큼 행복과 평화에도 순응했다.

  애초에 폭력을 즐기던 녀석들은 바뀐게 없었다. 누군가는 좀 누그러지고, 클럽의 기도 같은 일을 하기도 했다. 조직력이 좋은 몇몇 녀석들은 그들 만의 작은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말이 가드닝 서비스 같은 것을 뜻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마약 거래나 클럽 입구에서 협박질을 하는 것을 뜻한다.

 

ICF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The Firm(1988). 개리 올드먼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ICF (Inter-City Firm / 역주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훌리건과 관련된 훌리건 패거리) 는 정치가 배제된 일종의 이스트 앤드의 IRA(역주 : 아일랜드 공화국군)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그들 만의 레이브를 즐기기 시작하였고, 다른 이들은 클럽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부는 그 패거리들이 기업가정신을 띈 사회로 싹트게 된 것에 만족감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토요일의 축구 경기를 즐기러가는 미치광이들이 몇 명 있기는 했다. 그들은 절대 그 습관을 버릴 수 없어 보였다. 지난 몇 년 간의 그들을 말하자면, 그들은 마약과 코카인, 그리고 엑스터시에 완전히 중독되었다는 것이었다.

  Millwall의 원정 경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대부분은 몇몇 늙은 고집불통에 의해 발생했다. 엑스터시는 너를 싸움으로부터 예방하지 못할 것이며, 되려 네가 그 상황을 더 즐기게 만들었다. 몇 명은 과다복용으로 인해 죽기도 했다. 동부 패거리의 알려진 누군가는, 감정을 주체못하게 된 바람에 자신의 머리에 총알을 쑤셔박기도 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은 여전히 범죄적으로 불안정한 몇몇 인간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지난 월드컵에서 이따금씩 그 증거를 보였다. 유럽 대륙에서 축구 훌리건이 부상한 것은, 많은 외국인 패거리가 판만 짜여진다면 날 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무감각해진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물과 춤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수 년 동안 의학계는 이를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레이빙은 무언가를 성취해내었다. 축구 폭력의 유산은 중단되었다. 어린 사내 이야기꾼들은 테라스 싸움을 미친듯이 밤을 새워가며 하는 이야기로 대체하였다.  그들은 Cockney Rejects가 아닌, Flowered Up을 듣는다. 

  나쁜 아이들은 나쁜아이가 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힘, 흥분, 그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은 그것을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허나 이제는 그들이 동경할 새로운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옷을 입지만, 이따금씩 DJ를 하고, 중요한 클럽에서 쥐어짜지고, 또한 그들은 '허브'와 '화학물질'을 주머니에 채워넣고 있다. 매번 가끔씩, 그들은 머리 뒤에 축 늘어진 포니테일을 씻기고는 한다.

  이는 여전히 바보같은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훌리건 때처럼 서로를 그렇게 엿같이 내몰고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꽃의 아이들(역주 : 히피를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그저 좀더 실마리를 지닌 아이들일 뿐이다.

 

Rod Stewart가 모델이었던 Kickers

  그 순간을 그렇게 칭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가깝다. 폭력의 부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남성스러움이 패션에서 배제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브라이튼의 해변가에서 모드족과 락커들이 첫번째 싸움을 벌인 뒤로 15년 이후, 다음세대가 그 모든 것을 다시 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패션은 돌고 도는 끔찍한 습성이 있다. Kickers를 봐라.

  그러나 1981년의 Lad들에게, 지난 10년은 삶에 깊이 새겨질만한 교육이었다. 너가 전면적인 축구 폭동의 한가운데에 서있었을 때, 너를 둘러싼 모든것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네가 친구들로 가득찬 들판에서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 재끼고서, 춤을 추고서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때, 그 때 너는 애정과 증오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그저 전적으로 혼란이다.

  트랙슈트, 트레이너, 그리고 이너시티 트레인(역주 : 훌리건들이 원정경기를 떠날 때 주로 이용한 기차). 이제는 턴테이블과 trip(역주 : 환각제를 복욕하는 것을 뜻하는 slang), 그리고 테크노. 

누가 좀 skin up 좀 시켜줘, 제발 skin up 좀 시켜줘 (역주 : Skin up은 진정시키다라는 뜻 외에 대마를 말다는 슬랭이 있음)

 

'지난 밤에는 어땠어?'

'쩔었지, 40개 쯤 팔았어'

'나는 파티에 대해 얘기한거야'

- 'It's On', by Flowered Up 


THE FACE, December 1991

2009.4.9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아마추어 뮤지션들이 유명 아티스트의 음악을 연주해 웹에 올려놓은 커버 영상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천국이 있다. 나는 이 곡을 너무나 좋아해왔기 때문에 이토록 열심히 연습해서 당신들 앞에 선보입니다.내가 음악을 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나의 재능과 노력도 물론 있겠지만 이 훌륭한 아티스트에게 빚진 부분도 분명 있을 겁니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지금 이 노래를 합니다. 라는 애정과 경의의 표현. 그 존경의 에너지. 세상에 이만큼 긍정적인 것이 있을까. '아마추어' 희망은 그 단어 속에 있다. 그 단어가 포괄하는 모든 것이 희망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 희망을 믿을 것이다

2009. 6. 9
작가선언. 떨리고 무서웠다. 미란다 원칙을 숙지하고 나간 게 무색해지게 경찰은 우리한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조용히 끝내고, 술을 마시러 갔다. 사람들의 얼굴은 다양하고도 복잡했다. 근 일주일간 밤새 총대 메고 일한 사람 들은 피로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뿌듯함 을,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전보다 커진 괴로움을 안고 아무도 때리지 않고 방 패를 들이밀지도 않는 술집으로 갔다. 거기서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때는 이런 거 하면 1차 갈 생각도 감히 못했는데 너희는 2차까지 가다니 진짜 신기하다, 고 했다. 예전 같으면 되게 싫었을 텐데 그냥 들었다. 듣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예술가들도 있었다. 나처럼 그냥 작가가 직업인 사람도 있었겠지만 예술에 대한 냉소가 습관이 된 내 마음으로도 예술가라고 부르고 존중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그들이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며 낮은 목소리로 '시인과 촌장'의 노래들을 함께 부르는데 잠시 질투가 느껴졌다. 난 순결한 문학이 어쩌고 문학의 사명이 어쩌고 하는 말은 하나도 믿지 않지만 그 순간만은 그들의 얼굴이 몹시 예뻐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 순간의 풍경만큼은, 같은 문장을 읽는 사람들의 목소리라 쩌렁쩌렁 강당을 울리던 순간과 똑같이, 소름이 돋을 만한 것이었다.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몸에 무언가가 배서, 몸이 그걸 기억해서, 입에서 저절로 같은 소리가 나오다니. 그런 경험의 공유가 있다니 얼마나 부러운가.
따지고 보면 나도 누군가와 마주보며 서태지나 너바나나 블러나 패닉의 노래를 '같이'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이렇구나, 나는 이런데, 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끔찍한 일들에 문을 닫아건 채 골방에서 혼자 썩어 죽어가는 날들이 지겨워 미치기 직전일 뿐이었다. 근데 자리에 있던 76년생 글쟁이가 뽕짝 분위기로 끌고 가버렸다. 야이 같은 76년생인데 왜 뽕짝이냐. 제발 좀 멋있게 놀자고 다음에 보면 말해봐야겠다.
다만 그렇게, 전에는 모르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2009. 7. 24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솔직함. 투명함. 남김없이 드러내기. 아무리 무의미하고 추하고 가볍고 사람을 찔러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천박해 보인다 해도 나는 인간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내뱉는 모든 말, 모든 행동의 까끌까끌한 부스러기가 진실에 가장 가까운 요소라고 여겼다. 그래서 난 착한 어른보다는 언제나 발랄하고 반항적인 미친년, 미친놈이 좋았고 인간들의 바보스럽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말들과 냉소에 깊이 매료되곤 했다.
이제는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선함에 이르기 위한, 가공과 양념을 거친 그 부질없는 노력들은, 부서져가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부정태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긍정태를 만들어보려고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혼자 앓는 사람들의 노력이 값져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야 한다. 두 번 세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 세계의 겹쳐진 빛깔에 대해.

2016 여름 통권 87호

 

춤추러 오라 : 현 시대의 안무 사전

 
 
  즐겨라. 나와라. 펑키하라. 당신의 몸을 움직일 시간이다. 지금은 댄스 제네레이션이기에, Wallflower는 모든 장소에서 시들어가고 있다. 
  동네 술집에 가서 Tennent의 Extra 맥주를 몇 파인트 마시고, 대안거리에 눈독을 들이던 때가 있었다. 당신의 행동 가지 중에서 춤과 가장 흡사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난봉군 짓을 떨며 벌인 오년 동안의 자포자기였다. 당신이 할 수 있던 유일한 육체적인 운동이란 크리스털 팰리스를 서포트하던 작은 멍청이들을 괴롭히고 쫓는 일 뿐이었다.
  이제는, 만약 당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춤을 춰라. 다들 그러고 있으니. 그들은 자신의 펑키한 춤을 뽐내고 있으며, 자신의 바지를 펄럭여대며, 자신의 좋은 것들을 흔들어대고 있으며, 그들의... 어...? 정확히 그들이 무슨 춤을 추고 있냐고? 사실은, 아무도 확신 못한다.
  이것은 쉽게 익숙해졌다.
 

  초창기에는, 당신은 lindy-hop을, Jive를, jitterbug을 추었다. 만약 어떻게 추는 지 몰랐더라면, 당신은 지역 청소년센터에 가서는 비굴하게 추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역주 :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쉽게 따라 못할 난이도의 춤이다..
  그 이후에는 더 쉬워졌다. The Twist, The Mashed PotatoThe locomotion이 있었다. - 내가 말하는 것은, 이 춤들은 어떻게 추어야하는 지 또박또박 알려주는 음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모든 똘빡들도 트위스트를 출 수 있다 - 그것들은 그 시대의 'Agadoo' 였다.
  Disco는 존 트라볼타의 영화(역주 : 토요일 밤의 열기)를 따라하면 됐으며, 만약 당신이 Pogo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짜배기 펑크인 것이었다(역주 : The pogo는 펑크 밴드의 공연을 즐기는 이들로부터 탄생한, 그냥 점핑하듯이 추는 간단한 춤. 그런데 그걸 이해못하겠다면 '야~ 니가 진짜배기 펑크정신이다~'하는 일종의 비꼼). break- dancebody-popping 같은 춤 교본도 WH Smith(역주 : 잉글랜드의 서적 판매점)의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다. 
  이제 당신은... 당신만의 춤이 있는가? 정말로!
  이상적으로, 춤은 섹스와 마찬가지여야 한다 : 그저 당신이 그냥 하는 것이어야 한다. 허나 분명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 만의 춤을 추어서는 안된다. 자신 만의 춤은 엄청난 조롱과 부끄러움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Michael Clark(역주 : 스코틀랜드 출신 댄서)가 아니며, 우리 중 일부는 Bonnie Langford(역주 : 아역 출신의 잉글랜드 댄서)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실마리가 필요하다.
  온 세계가 괴로워 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리듬은 존재하지 않다 : Milli Vanilli가 이것을 증명했다. 만약 적어도 우리의 새로운 춤동작에 대한 어떤 이름이 있다면, 이는 모든 곳의 어색한 그루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모두들, 벽에서 나와라. 지루해지지 말고, 부끄러워 마지마라. 소녀들아, 소년들아, 그리고 추어라...
 
Techno Punch / 테크노 펀치
  이 꼬맹이는 꽤 한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남자들은 대개, 베이스라인의 킥을 기다린 다음, 뭔가에 올라 탔다. 계단이나 스테이지, 가끔씩은 트랙터(역주 : 말그대로 트랙터를 뜻함. 레이브 파티는 농가 같은 곳에서도 벌어졌기 때문에, 언급한 듯 하다) 같은 것에 말이다 - 즉흥적으로!
  두 발을 맞추고서는, 발가락을 뻗어라. 비트에 맞춰 약간 흔들리듯이 발을 모았다 펴면 된다. 이제는, 당신의 손을 뻗고서, 당신의 머리 위 허공을 향해 분노한 Eubank처럼 주먹을 휘날리라.
  이상적으로, 당신은 둥근 선글라스와 후드를 착용한 다음 뭔가 의미있는 말을 외쳐야 한다. 가령 '예! 가즈아!', '하드코어!' 혹은 -최소한 우리가 잊지않아야할- '멘탈!'
 

Spread Yer Legs / 니다리를 벌려라
Deee-Lite의 섹시한 여자 멤버나 Top of The Pops에 나오는 후기 Pan's People(역주 : 상술한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TV쇼 및 카바레에서 활동했던 여성 댄스팀)이 즐겨 출 법한 이 춤은 '뿔'처럼 보인다(비록 내 생각에는 Anusol의 튜브(역주 : 치질 치료용 연고)같은 모양새이지만 말이다). 당신의 가능한 넓게 벌린 다음 무릎을 살짝 쪼르렸다 폈다하라. 팔은 유혹적인 뉘앙스로 앞뒤로 위아래로 휘적거리면 된다.
 
 Riding The White Horse / 백마 타기
  Spread Yer Legs와 같지만, 거기서 입술을 반드시 삐죽거리고 가랑이는 튕긴 다음, 팔은 뻗어라. 마치 Desert Orchid(역주 : 영국에서 이름을 날렸던 경주마)를 타고서, 그녀석의 세번째 골드컵 우승을 이뤄낸 듯이. (역주 : 안타깝게도, Desrt Orchid는 이 칼럼이 써진 91년 골드컵에서 간발의 차로 세번째 우승에 실패 후 은퇴를 했다.)
 
The Dialler / 더 다이얼러
  이건 진짜 병맛 쩐다. 네 발꿈치와 발끝은 차례대로 탁탁거리면서 다리는 튕겨 대라. 너의 입술은 물소가 후렌치 후라이를 받아먹듯 내밀어라. 오른 팔을 뻗은 다음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듯 검지로 원을 그리면 된다(역주 : MZ세대는 뭔소리인지 모르겠지...). 일종의 미친 고양이 혹은 일종의 개빡친 또락새에 속하는 춤이다.
 

아래 서술하는 춤과는 무관함. 그냥 내가 Zomby를 좋아해서 삽입.

 Wash The Windows / 창문닦기
   또다른 병맛 쩌는 춤이다. 확 트인 야외에서 더 나은 춤이다. 거의 'Moonstompin' 추듯이 제자리에서 껑충 뛰면 된다. 당신의 손이 산양 가죽(chamois leathers / 역주 : 청소용 걸레로 많이 쓴다)이라고 상상하라. (양손을 사용해) 오른쪽 창을 닦은 다음 왼쪽 창을 닦아라. 때때로는, 살포시 뛰어다녀라. 이걸 본격적으로 하려거든, 너가 사내자식 일 경우 덥수룩한 단발머리어야 하고, 여자라면 Karen Carpenter 컷을 해야한다. 창문닦이를 할 때는, 할배가 입을 법한 플란넬 잠옷을 입어야 하는 점도 명심하고.
 
  Helloing / 헬로잉
  Voguing의 쌈마이 버전이다. 치명적인 포즈를 취한 뒤, 아무 것도 안하면 된다. 전적으로 말이다.
 
The Balearic Shuffle / 발레아릭 셔플
지들이 잘난 걸 아는 존나 쿨한 놈들 대다수는 지금 이 춤을 밀고 있는 중이다. 미치코(Michiko London)나 리치몬드(Destroy John Richmond)옷을 입은 채 그저 댄스 플로어 뒷편에서 서있는 놈들 말이다(역주 : 둘다 80년 대~90년 대 초반 영국 힙쟁이의 상징인 브랜드). 그 양반들은 춤추고 싶어 하면서도, 지네 옷이 구겨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한다. 몸을 흔들거나, 팔을 살짝 깔딱 대거나, 머리를 끄덕이거나, 발을 끈다. 그러곤 멈췄다가 다시 반복한다. The Milk Bar Mambo 라고도 알려져 있다. (역주 : 본디 Mambo 댄스는 경쾌한 라틴댄스인데, 상술한 것처럼 가만히 까딱거리는 게 전부인지라 비꼬는 의미에서 저렇게도 불렸던 것 같다.)
 
니가 죽어도 싫다 한들 알아놔야 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인싸 무리가 인디 댄스에 끼얹은 춤동작 말이다. 그래서 여기 소개한 것이다..
 
The Bez Barney / 뿔달린 망나니
다죽자. 인기 많은 북부 밴드들과 무대 위에서 비틀거려라. 타이슨 전에서 6라운드 상황인 브루노(역주, 브루노는 타이슨과 5차전에 TKO를 당했다. 아마도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 1라운드 더 뛴 상태처럼 굴라는 것인듯)처럼 와리가리하라. 마라카스를 흔들어 재껴라. 탬버린을 흔들어라. 스테이지에서 굴러 떨어져라. 다죽자.
 

라이브에서 트레이드 마크인 꽃을 메고서 춤추는 중인 Barry Mooncult

The Mooncult Strut
Flowered Up(역주 : 90년 대 초반 영국에서 인기있던 밴드)의 Barry Mooncult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Camden(역주 : 영국의 지역. 반체제 문화의 온상지이며, 라이브 클럽이 많다)의 반역자 패거리들과 무대 위로 올라가라. 초라한 닭처럼 서성거려라. 모든 관중들이 너와 함께 올라올 것처럼 굴어대라. 만약 관계자들이 제지하려고 하면, 싱어에게 그들을 꺼지라고 하도록 하라. 이 짓을 하기위해서는, 레오타드 문양의 6사이즈 쫄쫄이옷을 입어야 한다.
 
The Pests Conga 
88년에 죽었다고 생각한 트렌드가 돌아온 것만 같다. 세명 혹은 그 이상이 추는 춤, 너는 다섯 명 이상의 무리가 끼는 걸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춤을 추는 상황은 이른 때에 몇몇 풋내기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난 다음 절반 정도가 과음한 이후에 들러붙으면 일어난다. 눈이 동그래진 '친구들'은 어깨동무를 한 채 'Oops Up Side Your Head' 춤(역주 : 여담이지만, 이 춤은 밴드가 고안해낸 것이 아닌, DJ Alex Dyke라는 DJ가 해변파티에서 관객들에게 앉은 채 노젓기를 하라고 유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을 직립버전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고선 웃으며 모두에게 합류하라고 찡찡거리는 것이다. 그놈들의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가는 것으로 그네들의 약빨을 채워줘라. 이야말로 전적으로 와글썩하지 않겠는가?
 

영상 중반을 보면 일열로 나란히 앉아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돋보인다.

  이 팁들이 충분치 않거든, BBC2의 TV쇼인. Dance Energy를 보아라. ragga(래게에서 파생된 음악 장르. 래게와 R&B가 결합한 댄스뮤직인 점은 유사하지만, ragga는 서사적인 면에서 좀더 진중한 면이 있다고 한다. 근데 영상을 보면 ragga이 아니라 dancehall인듯 한데..) 선생들을 보고 배우면 된다. 그러나, 네가 그 쇼에 출연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너가 니 동네에서 British Knights 한 켤레나 200파운드 짜리 Troop 트랙수트를 구매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 : 둘다 그 당시 영국에서 인기 있던 스트리트 브랜드이다. 한편 Troop은 좀 안습인 점이 있는데, 80년 대에 미국에서 유대계 사람과 한국계 사람이 창립해 나이키 급으로 인기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백인 우월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이 운영주체라는 거짓 소문이 돌아서 망했다고 한다. 다만 유럽에서는 라이센스 판매체제였고, 그 소문이 퍼지질 않아서 90년 대까지도 살아남아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니가 Hemel Hempstead(역주 : 한국으로 치면 파주시 내 어느 읍 정도의 위상을 지닌 타운) 출신이라는 좆같은 tmi까지 방송에 나오겠지만, 그건 신경 꺼라.
  월플라워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인데, 여전히 몇몇 베뉴에서는 Tennent의 Extra 맥주를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누구는 찝쩍거리기만 하기도 하는걸(니가 경찰을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한, 5년 동안 춤을 안춰도 된다[역주 : 아마도 불법 Rave파티가 많았다보니 이런 말을 언급한듯]). 만약 너가 춤추도록 강요 당한다면, 몇몇 Wombles의 더 나은 스텝을 떠올리길 애써라.
 
  계속 해서 추측해봐라, 그들은 너가 아방가르드를 밀고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를 따름이다. 내 말은, Martin Kemp(80년 대에 인기 있었지만 수직낙하한 DJ. 한국으로 치자면  80년 대 말에서 90년 대 초까지만 해도 유명했지만, 이후 추억의 DJ가 된 DJ처리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도 한 때나마 무브먼트를 이끌 사람으로 여겨진 때가 있었지 않았는가.
 

 
 THE FACE, August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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